[문화와사람] 남사당놀이 준 기능보유자 지운하 선생

▲ 남사당놀이 준 기능보유자 지운하(왼쪽) 선생과 그의 아들 규현씨.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는 마당 한가운데서 막대기로 접시를 돌리고 한쪽에선 땅재주를 넘는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외줄타기. 풍물이 한껏 흥을 돋우고 나자, 드디어 한 손에 부채를 쥔 이가 등장해 줄 위에 한 발을 내딛는다.

영화 ‘왕의 남자’로 인기를 얻은 ‘남사당놀이’는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됐고, 200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됐다. 지운하(66) 선생은 남사당놀이 준 기능보유자이며 전수 조교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인천 태생으로 3년 전 부평에 남사당놀이 전수관을 마련했고, 작년에는 사단법인 극단 ‘유랑’을 만들어 공연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고 있다. 한창 때, ‘풍물 하면 지운하, 지운하 하면 풍물’로 회자됐던 그를 지난 20일 그의 전수관에서 만났다. 그의 이야기는 한편의 장편 드라마와 같았다.

상모 가장 못 돌리는 아이

가장 먼저, 그가 풍물을 하게 된 계기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숙골(현 남구 도화동)에서 오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네 살 때 한국전쟁이 터져 당진으로 피란을 갔다가 9.15 수복 때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휴전이 된 후 동네는 이전 모습을 서서히 되찾아갔다. 가난한 삶이었다. 하지만 정월대보름과 추석만큼은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농악을 울리고 잔치를 하며 서로의 고된 삶을 다독였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그 마을 풍물단 상쇠(=농악대 우두머리인 꽹과리 제1연주자)였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풍물을 보고 자랐지만 그에게 딱히 재능이라고 할 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단지 풍물 장단을 들으면 신이 나고 기분이 마냥 좋을 뿐이었다.

1957년, 지 선생이 열한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전국대회에 출전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풍물단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동과 면, 군 대항에서 1등을 하면 서울무대에 설 수 있었다. 지 선생의 아버지는 아이 8명과 어른 30여명을 선발하기 위해 전국에서 예인이라 불리던 사람들을 데려다 마을 사람들을 교육시켰다.

당시 남사당 꼭두쇠였던 최성구 선생이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숙골을 찾았다. 지 선생의 아버지는 최 선생에게 교육비로 한 달에 쌀 한가마니를 전달했다. 아이 20~30여명이 이때부터 1년간 최 선생에게 풍물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 선생은 상모를 가장 못 돌리는 아이였다. 아무리 시늉을 해도 도무지 되질 않았다. 8명 안에 들어야 서울 문턱에라도 가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날마다 상모를 돌렸다. 어머니, 아버지가 주무실 때 혼자 마루에 나가 돌려보기도 했다.

상모가 기막히게 잘 돌아… 깨고 나니 꿈

어느 날, 상모가 기가 막히게 잘 돌아갔다. 너무나 신기했다. 잠에서 깨보니 꿈이었다. 허망한 마음에 ‘꿈이로다 꿈이로다 꾸고 나니 꿈이로다’ 하며 시를 읊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최 선생이 “너는 감수성이 예민하니 예인이 되기 좋은데, 왜 몸으로 하는 건 못 하느냐”며 안타까워했다. 지 선생 역시 속이 타는 건 마찬가지였다.

추운 겨울, 한밤중에 우물물을 퍼서 세수를 하고 대청마루에서 상모를 썼다. 마치, 꿈속인 양 잘 돌아갔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선생님에게 보여주고 싶은 생각에 잠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아침마다 학교 가기 싫어했던 그였지만, 그날은 마음이 먼저 학교로 내달렸다.

학교에서 최 선생을 보자마자 “이제 상모를 잘 돌릴 수 있으니 저 하는 것 한 번 봐 주세요” 하며 선생님을 따라다녔다. 귀찮아하던 최 선생이 그에게 기회를 줬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모를 돌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 간밤에 잘 돌아가던 상모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지 선생의 얼굴은 눈물콧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학교가 파한 뒤, 아쉬운 마음에 학교 담벼락에서 한 번 더 상모를 돌려보았다. 참 이상했다. 혼자 할 때는 이렇게 잘 돌아가는데, 왜 선생님 앞에서는 잘 안 되었을까.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저만치서 최 선생이 보고 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 지 선생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날 저녁 최 선생이 지 선생의 아버지를 찾았다. 얘기를 나누던 아버지가 지 선생을 불렀다. “너 그렇게 서울 가고 싶으냐?” “안 갈래요. 할 줄도 모르는데요 뭐” “선생님이 너 소질이 있다고 하시니 열심히 해봐라”

가장 못하던 지 선생이 최고로 잘 하는 아이로 변신한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한 가지를 배우면 두세 가지를 앞서 받아들였다. 1959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경기도 대표팀 일원으로 출전해 개인 특상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이후 최 선생과 함께 전국 장터를 돌았다. 최 선생이 꽹과리를 치면 지 선생은 상모를 돌렸다. 어린 아이의 기가 막힌 상모 돌리는 솜씨에 주변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의 이름도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렇게 3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엄마가 너무 보고 싶고, 학교도 다니고 싶었다. 선생님 몰래 서산에서 인천 가는 배를 탔다. 물어물어 숙골에 도착해 엄마 품에 안겨 한없이 울었다. 힘들었지만, 풍물과 인생, 두 가지를 모두 배운 시간이었다.

풍물 60년, 외롭고 쓸쓸한 광대의 길...지금은 함께하는 아들과 제자 있어 행복

그는 그 후에도 풍물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다.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던 시절, 대성목재 농악부 창단 멤버로 들어가 대통령상을 받았고, 제자와 함께 전국을 돌며 야인생활도 했다. 베트남 전쟁 때에는 군악대로 지원했다가 전방에 배치 되는 바람에 직접 총을 잡기도 했다. 이때 맞은 총알 자국이 지금도 ‘소눈깔마냥’ 등허리에 남아있다.

제대 후, 시골 장터에서부터 큰 국제무대까지, 장소를 마다하지 않고 공연을 했다. 쉐라톤 워커힐 사물놀이 단장으로 채용돼 20여년을 지내다 1998년 국립국악원 지도위원으로 위촉됐다. 2007년 정년퇴임 후 공연과 남사당 전수교육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2005년부터는 아들인 지규현(36)씨가 그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꽹과리나 장구 소리를 들으면 흥이 나기에 앞서 눈물이 난다고 했다.

“풍물소리를 듣고 눈물이 난다고 하면, 이해가 가십니까? 풍물을 배우기 위해서 어린 나이부터 갖은 모멸과 치욕을 겪었습니다. 외롭고 쓸쓸히 광대의 길을 걸어왔어요. 아무리 멋있는 판을 꾸며도 그 속에는 한이 스며들어있기 마련입니다. 지금 세상에 이 과정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요”

그는 “그래도 단 하나뿐인 아들이 아버지를 믿어주고, 내 길을 따르겠다고 하니 정말 기쁩니다. 전국에서 벌어지는 풍물대회에 심사위원으로도 불러주고, 남사당놀이를 배우려는 후배들이 있어, 제가 한 길을 걸어왔다는 데 뿌듯함이 들죠. 힘든 순간이 많았지만 참고 견디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말했다. 앞으로 제자들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게 그의 남은 꿈이다.

“60년 가까이 풍물 한 길만 걸어왔습니다. 솔직히 이 일로 돈은 못 벌어요. 가족들은 고생을 많이 했죠. 남사당놀이를 전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수만 하면 뭐합니까. 제자들이 제대로 설 수 있는 자리를 꼭 만들어주고 싶어요”

2014년은 그가 풍물을 시작한 지 딱 60년 되는 해이면서, 남사당놀이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지 50년 되는 해다. “기념식을 할 겁니다.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는 무대를 만들어야죠.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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