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인천투데이|

차별을 줄이는 제도는 차별이 아니다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최근 정부가 미혼 청년들에게도 아파트 특별공급 기회를 주는 청년층 대상 주택정책을 내놓으면서 ‘중장년층에게 역차별 논란(혹은 우려)’라는 제목을 단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이런 상황을 설명할 때 ‘역차별’이라는 용어를 쓰는 게 적절할까.

‘역차별(reverse discrimination)’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만으로 억압을 경험하게 되는 사회적 소수자(억압그룹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 정책으로 특권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 차별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이다.

장애인 정책이 너무 잘 돼있어 비장애인들이 오히려 장애인들에게 차별을 당하거나 사회적인 손해를 보게 된 사례가 있을까. 이주민 정책이 너무 잘 돼있어 선주민들이 오히려 이주민들에게 차별을 당하거나 사회적인 손해를 보게 된 사례가 있을까.

차별을 줄이기 위한 제도는 차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차별을 줄이는 과정으로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의 기울기가 아주 조금이라도 완화됐을 때 그 기울기에 의해 이득을 보고 있는 기득권층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을 빼앗기는 것처럼 느끼며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현상이다.

흑인과 백인의 대결이 아니다

미국에선 대학교 입학에 흑인과 히스패닉의 비율을 일정 이상으로 정해 둬야 한다는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가 시행되고 있다. 백인들 중에는 ‘왜 실력으로 평가하지 않고 인종으로 우대를 하느냐’며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의 역사와 현재까지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한 이해와 인정이 없는 주장이다. 적극적 조치에 해당하는 인종에서 아시아인을 제외한 것은 미국사회의 흑인과 히스패닉에 대한 차별의 역사 그리고 한국, 일본, 인도 등의 아시아에서 온 이주민들의 교육열로 그동안의 입시 성과를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아시아인을 적극적 조치의 대상이 될 수 있게 하면 흑인과 히스패닉이 그 제도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 내 한인사회에선 이 정책은 아시아인에게 역차별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이제는 인종차별과 동시에 사회계급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때가 됐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상류층인 흑인이나 히스패닉이 빈곤층인 아시아인보다 배려 받아야 할 대상이냐’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직 질문되지 않고 있는 문제는 이런 정책을 쓰더라도 왜 여전히 백인우월주의, 학력 학벌 중심주의, 자본주의 사회가 공고하게 유지되고 있냐는 점이다.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작은 파이를 나눠 먹어야 하는 ‘누가 더 차별당하는지’ 싸우게 만드는 형국이다. 모든 사람이 인종이나 사회계급과 상관없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여성과 남성의 대결이 아니다

한국에선 여성 차별을 줄이고자 하는 시행하는 제도를 두고 ‘남성을 역차별하는 조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이제는 남성이 더 차별받는 성별이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남성이 성차별을 받는 시대가 됐다는 뜻인데 그런 사회는 아직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앞으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어떤 성별이 ‘성차별을 당한다’는 것은 ‘성별을 매개로 차별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성별을 ‘성별을 이유’로 차별할 수 있는 다른 성별의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경험하고 있고 여성에게 성별만을 이유로 차별할 수 있는 다른 성별의 사람들은 남성이다. ‘남성들이 성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려면 남성들이 성별로 인해서 차별을 당하고 있어야 하고 남성을 성차별하는 다른 성별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일은 일어나고 있지 않다.

여기서 아직 질문되지 않고 있는 문제는 성차별과 성폭력을 줄여 나가기 위한 정책을 실시한다고 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남성중심의 사회와 문화가 공고하고, 여성대상 폭력과 살인 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여성에게 돌봄노동을 전가하며 돌봄노동을 평가절하하는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을 성별을 이유로 차별할 수 있는 성별이 아니다. 남성들이 더 큰 성차별을 경험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잘 살펴보면, 성별이 아닌 다른 정체성 관련 차별을 ‘성별로 인한 차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자본가와 국가에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야 하는 문제들의 본질은 외면하면서, 비난이 용이한 소수자 탓으로 돌리는 쉬운 선택을 하면서 근본적인 해결의 가능성조차 차단하고 있다. 남성이 여성보다 더 오래 일하고 더 위험한 일을 많이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긴 수준의 노동시간을 견디고 있고 안전하지 않는 노동환경에서 일하다가 사망하는 노동자의 수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다. 이 문제는 당장이라도 고쳐져야 할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이 문제의 이름이 성차별일까, 아니다. 노동문제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아무리 착취해도 상관없는 사회구조와 개입하지 않는 국가가 문제다. 이를 노동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전략 중 하나가 “남자라면, 아빠라면, 가장이라면 참고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가 남성에게 강요하는 ‘남성성’에 의한 억압이라고 한다.

여성에게 성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여성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지만 가부장제 자본주의에 의해서 억압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면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그걸 인식하게 되면 성평등한 사회를 요구하는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가부장제 자본주의와 싸우는 동료가 될 수 있다.

누가 당신을 착취하고 있는가

성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조치로 채용 시 여성의 비율을 확보해 둬야 한다는 적극적 조치가 ‘남성을 차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 사회의 역사와 문화가 현재까지 미치고 있는 영향 관련 이해와 인정이 없는 주장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한국사회에는 아직 ‘여성고용할당제’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고용은 아니지만 유일하게 작동하고 있는 ‘여성할당제’는 선거 때 비례대표 순번에서 홀수 번호를 여성으로 해야 한다는 것 단 하나 밖에 없다.

‘여성고용할당제’는 아직 없고 공무원 시험에만 적용되는 ‘양성평등 채용목표제’가 있다. 한 성별이 70%를 넘을 수 없게 한 규정인데 남성들이 수혜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제도 때문에 더 뽑히게 되는 성별이 남성이라는 뜻이다.

성별에 의해서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차별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는 사회구조는 현재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더 힘들다는 것의 근거로 군대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징병제 하에 억지로 군대에 가야하고 최저임금과 같은 최소한의 대가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은 문제다. 그런데 왜 이 문제를 여성들에게 이야기하는 걸까.

역사적으로 살펴보더라도, 군대는 근대국가의 탄생 이후 남성들이 남성들만 시민의 자격을 갖기 위해서 그리고 남성들만 군인이 되어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고 여성과 어린이를 보호하는 위치에 남성을 두기 위해서 남성들만 군인이 될 수 있게 했다.

군대문제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차별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누가 나를 착취하고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중장년과 청년의 대결이 아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정부가 미혼 청년들에게도 아파트 특별공급 기회를 주겠다고 결정한 것을 ‘중장년층에게 역차별’이라는 표현하는 게 적당할까.

중장년층에도 안정적인 주거가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안정적인 주거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질문은 왜 국가가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주거권을 보장하지 않냐는 것이다. 왜 집이 투기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냐는 것이다.

기후재난에 취약한 반지하를 없애겠다면서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5조6000억원(올해 대비 25.1%)이나 삭감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야 한다. 집은 인권이다. 누구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

운 좋게 부자 부모님을 만난 사람만 집을 가질 수 있는 사회, 운 좋게 주택 청약에 당첨된 사람만 집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집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공공임대주택으로 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원한다면 기간 제한없이 질 좋은 공공임대주택에 살 수 있어야 한다. ‘내 집 마련’이 꿈이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집 마련이 필요없는 사회가 돼야 한다. 내 집을 마련하지 않아도 오르지 않는 저렴한 월세로 평생 살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가능한 일이다.

청년과 중장년층의 인권이 상충되는 것처럼 묘사하고 여성과 남성의 인권이 상충되는 것처럼 묘사하는 정치와 언론의 프레임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낼 수 없게 만든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 더 차별당한다’ ‘내가 더 힘들다’고 주장해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내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는 것 같은 사회 속에서 ‘역차별’이라는 용어가 엉뚱하게 쓰이며 유행하고 있다.

※ 외부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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