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병구 인천교육연구소장ㆍ인천해양과학고
궤도 위만 달리는 기차는 더 넓은 세상과 만나지 못한다. 늘 하던 일을 반복하는 일상에서 새로운 배움이 나오기 어렵듯이. 우리가 경외하는 선인들의 삶에는 다른 세상과 만나 뒤흔들렸던 흔적들이 촘촘하다. ‘열하일기’에선 박지원의 삶을 뒤흔들었던 낯선 세상과의 조우를 볼 수 있다. 청나라를 본 후의 그는 이전의 그를 훌쩍 뛰어 넘는다.

학교의 교육과정은 궤도의 논리에 충실하다. 검증된 길을 갈 수 있도록 설계돼있다. 안내자인 교사를 따라 안전하게 주어진 과정을 마치면 ‘바람직한’ 인간형에 이르게 된다. 시계의 한 부품이 시계를 작동하는 데 기여하듯 교육과정을 이수한 학생은 사회의 부품으로 조합된다. 덜커덩거리면 교육이 제 역할을 못 한 것이다. 딱 들어맞게 사회 성원으로 안착시켜야 성공적인 교육이다.

변화의 속도가 느린 사회에서는 부품들의 성실성만으로 발전이 가능했다. 묵묵히 제자리를 지킨 대가로 성공을 거머쥐는 일도 있었다. 사회가 격변을 거듭하면서 교육과정 앞에 ‘탄력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고정된 나사못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탄성을 발휘하는 ‘퍼지(fuzzy)’ 부품을 만들라는 주문이다.

하지만 탄력성은 쉽게 생기지 않는다. 체험학습 앞에 ‘창의’를 붙인다고 창의적인 체험학습이 절로 이뤄지지 않듯. 탄력은 궤도를 벗어나려는 용기나 일탈에 대한 아량이 있을 때 생긴다. 학교축제를 보면 알 수 있다. 오늘의 학교가 얼마만큼이나 휘청휘청 탄력을 수용하고 있는지.

‘소녀시대’가 대학축제를 점령했듯, 학교축제는 상업문화 뒤범벅이다. 상업문화는 학생들을 구경꾼으로 내몬다. 남의 노래를 하는 학생이나 따라 부르는 학생이나 다 주인이 아니다. 늘 보던 몸짓이고 베껴낸 유행어라서 수업을 안 한다는 것 빼고는 흥이 없다. 심지어 학교 축제를 기획하는 것도 교사요, 도망 다니는 학생들을 끌어다 앉혀 놓는 것도 교사다. 일상에 없는 축제를 어느 날 갑자기 만들려니 생기는 사달이다.

학교축제가 저수지라면 동아리 활동은 실개천인데, 거기서부터 흥과 끼가 말라붙어 버렸다. 안 나는 신명을 일부러 만들어 내려니 곤욕이다. 손쉬운 방법으로 상업문화를 끌어댄다. 학생들도 그게 편하다. 익숙해서 편하기도 하고 새로운 실험을 하려다가 교사와 충돌할 일 없으니 안전하다.

축제는 일탈과 붙어 다닌다. 좁은 골목에 성난 소를 풀어 놓고 그 앞을 냅다 달리는 산 페르민 축제는 일탈의 정점을 보여준다. 붉게 으깨진 토마토가 사람과 마을을 뒤덮는 축제는 어떤가?

학교에 소를 풀어 놓거나 토마토를 던지게 할 수는 없다지만 ‘건전축제’라는 교육청의 지시는 솟던 흥도 주저앉힌다. 토마토 값 폭락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었다면 오늘의 그 축제는 없다. 분노조차 흥이 되면서 축제는 달아올랐을 것이다.

경계를 넘어 일탈을 맛볼 때 새로운 감각이 열린다. 아이들의 놀이도 경계를 넘나든다. 남이 그어놓은 금을 밟거나 뛰어들면서 놀이는 신명을 얻는다.

한 때, 학교에서 풍물패는 금기였다. 시위대 취급을 받아 대학이나 공장으로 피해 다녀야 했다. 학생들은 풍물을 두드리며 학생자치가 왜 필요한지 자습했다. 그들은 축제 때나 되어야 학교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학교축제가 허용할 수 있었던 최대치에 도전하고 일탈을 꿈꾸던 학생들에게 풍물은 세상과 만나는 창구였다. 학교가 깔아 놓은 궤도를 넘나들며 익힌 풍물 가락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이웃 학교와 연대하는 매개였고 성장의 의미를 묻게 하는 촉매였다. 부평풍물축제에 학생풍물경연이 자리 잡은 건 그런 시대의 축적이다.

하지만 갈수록 학생 풍물패는 줄어든다. 그 많던 학교 풍물패는 어디로 갔을까? 실개천이 마르면 부평풍물 잔치판도 타들어 갈 것이다. 수 십 년이 흘러 소리는 있으되 풍물 정신은 가뭇가뭇한 부평풍물축제를 만나게 될까 걱정이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