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사람] 부평문화원 조영호ㆍ김면지 연구위원

▲ 부평풍물을 무형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한 작업을 해온 김면지(왼쪽)ㆍ조영호 연구위원.
부평은 ‘풍물도시’일까? 부평풍물대축제가 올해로 16회째를 맞이하지만 아직까지 부평과 풍물에 대한 많은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여기저기 산재된 정보들은 많지만 아직 이를 고증해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재현해내는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부평문화원(원장 빈종구)은 작년부터 부평풍물을 인천지방무형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한 작업을 추진해왔다. 지난해 11월 조영호(58ㆍ갈산동)씨와 김면지(39ㆍ청천2동)씨를 부평문화원 문화재 연구위원으로 위촉해 문헌과 구술을 바탕으로 자료를 정리했다.

지난 6월에는 문화재로 등록할 풍물 종목을 다섯 가지로 확정하고 부평구에 문화재 지정 신청을 했다. 8월부터 100여명으로 구성된 부평향토민속보존회를 꾸려 본격적인 시연 연습에 들어갔다. 이제, 오는 23일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시연을 하고 나면 문화재 지정을 위한 작업은 거의 마무리 된다. 조영호ㆍ김면지 연구위원을 지난 6일 부평문화원에서 만나 부평풍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부평에 병참기지 들어서 풍물 명맥 끊겨

“1800년대에 ‘부평군’이 있었는데, 굉장히 컸어요. 현 구로구가 ‘부평군 수탑리현’이었다는 기록이 있죠. 한강이남 서쪽 지역에선 가장 넓은 지역이었어요” 조 위원은 부평지역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20대부터 인천 역사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찾아 공부한 덕분이다.

인천은 해양문화와 농경문화 두 축을 기본으로 발전해왔다. 이 가운데 농경문화는 부평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넓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고유한 문화가 없었을 리가 없어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조병창(=군사물품을 만드는 공장)을 부평에 지으면서 자유로운 문화흐름이 끊겨버렸을 뿐이죠”

농경지였던 부평에 일본은 공장을 지었다. 당시 부평지역 전체가 일본 병참기지였고 일제 강점기 말에는 거의 풍물을 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삼산동 지역은 논농사 경작지로 개간을 했다. 다행히 해방 후 농지였던 삼산동 일대에서 풍물문화가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다. 부평구에서는 유일하게 해방 후 두레가 이어져 지금까지 주민들에게 전승되고 있다.

“민속학문은 구술(口述)이 아주 중요해요. 역사학이나 고고학은 유물과 기록이 있지만 민속은 사람 자체가 증거고 역사잖아요. 그래서 생존해계신 분들 만나 구술 자료를 확인하고, 새로운 증언을 받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죠” 김 위원은 조 위원과 함께 풍물의 맥을 찾기 위해 삼산동 일대에서 풍물과 관련된 인물을 만나고 다녔다.

부평두레풍물 전 과정 되살려

두 사람은 문헌자료와 구술 증언을 바탕으로 부평두레풍물(농악) 전 과정을 되살려냈다.

“흔히 풍물 하면 악기 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풍물에는 놀이와 춤이 있고, 재담, 공동 노작, 그리고 마을에서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의식도 포함돼있어요. 농사는 혼자 지을 수 없거든요. 함께 모여 농사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이 풍물이죠”

이들은 부평두레풍물 진행 과정에 등장하는 다섯 가지 종목을 선정해 인천지방무형문화재로 신청했다. 두레ㆍ호미걸이ㆍ농기놀이ㆍ우물고사ㆍ판굿이 그것이다.

우선 ‘두레’는 마을 주민들이 협동해서 농사를 짓는 전 과정이다. 두레에는 논두레ㆍ밭두레ㆍ길쌈두레 등이 있는데, 부평두레는 논두레다. 징이 울리면 두레패가 모여들고, 두레기(旗)를 앞세워 일터로 이동한다. 이동 중 다른 두레패와 만나면 두레기를 흔들어 인사한다. 논둑에 두레기를 세워 꽂고 잠시 쉬다가 논으로 들어가 모내기를 한다.

전체가 둑에 올라와 새참을 나누며 흥이 나면 ‘인천팔경’과 ‘노랫가락’ 등 소리를 하며 흥겹게 논다. 논에서는 ‘농부가’를 부르면서 오후 모내기를 마친다. 일이 끝나면 한바탕 농악을 치고 헤어진다.

‘호미걸이’는 말 그대로 호미를 창고에 거는 것을 뜻한다. 다음 농사를 위해 연장을 잘 손질하고 농사짓는 데 도움을 준 연장에 고마움을 표현하는 의식이다. 음력 7월 백중(百中)을 전후로 모든 연장을 거둬들이고 하루 풍요롭게 노는 행위를 표현한다.

농가와 마을 두레패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고, 약속된 장소에 모여 농사일에 지치고 힘든 심신을 농악을 치며 달랜다. 백중 무렵이면 그 해 농사의 성과를 알 수 있었다. 농사가 가장 잘 된 집 일꾼을 우두머리로 삼아 삿갓을 씌워 황소 등에 태운 뒤 마을을 돌아다닌다.

‘농기놀이’는 정초와 백중에 했던 성대한 행사다. 농기(農旗)는 두레조직 전체에 단 하나 존재하는 깃발이다. 농기에는 용이 그려져 있거나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농기놀이는 이 농기와 마을기를 가지고 나와 서로 인사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 풍물은 기본이다. 마을마다 농악기를 울리며 지신밟기를 한다.

‘우물고사’는 우물을 정갈하게 하는 의식으로, 음력 삼월과 칠월칠석에 지냈다. 농경사회에서 우물은 마을 사람들의 생사고락을 상징한다. 우물 아래 물이 고인 곳에 미나리를 심고, 제물로 소를 잡았다. 쇠고기와 함께 무시루떡을 마을 주민들과 나눠 먹었다. 우물고사는 두레판굿으로 성대하게 끝난다.

마지막 ‘판굿’은 음력 12월 30일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신나게 흥을 돋우는 것이다. 세시풍속이나 계절제에서 가장 마지막에 하는 행사로, 각 마을에서 가장 자신 있는 장기를 선보이는 일종의 장기자랑이다. 한 해 농사가 모두 끝난 뒤 수확의 기쁨을 나누면서 마을제와 가신제(=집안의 안녕과 행운을 비는 굿)를 지내고, 동네마다 농악기와 먹을거리를 동원해 한판 신명나게 노는 것이다.

23일 시연에 삼산동 주민 100여명 참여

이 다섯 종목을 시연하기 위해 조 위원과 김 위원은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자료를 정리하고, 시연팀을 직접 지도했다. 시연에는 삼산동 주민 100여명이 참여한다.

김 위원은 “마을 주민들이 직접 복원사업에 참여하는 데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전문가들이 시연을 하면 실력은 더 좋겠죠. 하지만 잘 하든 못 하든, 마을 주민들이 이어받아야 앞으로 그 지역에서 향토문화가 계속 살아남겠죠”라고 말했다.

조 위원은 쉽지 않은 복원과정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조금 더 일찍 이 사업을 추진하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했다. “예전부터 있었던 구술 자료를 바탕으로 증언을 받으러 어르신들을 찾아다녔어요.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몸져 누워계시기도 하고, 이미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그 분들이 조금 더 젊었을 때 해야 했는데 말이죠. 참 안타까워요”

인천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해도, 그것이 끝은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숨죽이고 있었던 부평풍물을 세상에 알리는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김 위원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면 부평풍물의 역사부터 당시 생활모습까지 하나하나 풀어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거예요. ‘우리 것’이 있으면 정부에서 지원도 받을 수 있고, 여기저기서 배우러 오는 사람들도 생기겠죠”라고 했다.

조 위원은 “문화재로 지정됨과 동시에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가야죠. 아무쪼록 이번 시연이 제대로 평가받아 부평풍물이 성장하는 발판이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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