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지난달 25일부터 이달 1일까지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열렸다. 이번에 선택한 영화는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로부터의 증언’이다.

자이니치 2세 박수남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오키나와에서 있었던 일을 증언하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이다.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펼쳐진 전쟁에 대해 한일의 생존자들을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각자의 증언이 향하는 사실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단 이들의 사실적 고백으로 어떤 진실을 추출하는 일은 보는 자의 몫으로 남긴다.

영화는 조선인 군속으로 오키나와에 끌려간 조선인 생존자 남성들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언뜻 일제강점기 시기 핍박받은 조선인의 삶을 조명하려는 것 같지만 영화는 이를 이분법적 구도로 매몰시키지 않는다.

조선인 군속 생존자의 말에 이어 오키나와로 파병된 일본군 병사, 일본군 장교, 오키나와 주민은 물론이고 속아서 잡혀 온 조선인 여성들의 증언이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한일 당사자의 이야기는 ‘가해자 일본 대 피해자 조선’의 구도로 말끔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어떤 일본군 병사는 조선인 군속이 오키나와에서 착취당하다가 패전 직전 미군과의 대치 상황에서 총알받이로 쓰이리라는 운명을 모르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일본군이자 조선인 군속의 죽음을 목격한 자이고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조선인 살상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한편, 다른 일본군 출신 생존자는 상부의 명령하에 조선인 군속 처벌에 직접 개입한 적이 있다. 조선인 군속이 오키나와 주민에게 해를 끼친다는 ‘소문’을 확인하라는 명령에 따라 그렇게 했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내심 중책을 수행했다는 자부심마저 흘낏 스치는 듯하다.

그런데 그를 그저 나쁜 일본인 병사라고 말하는 것으로 족할까. 그는 자신이 조선인 군속의 총살에 가담했음을 인정하면서 인터뷰 말미에 이르러 ‘그때는 다들 살고 싶었으니까’라며 어두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다.

자부심과 죄책감이 공존하는 이 모습을 보고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를 청산할 수는 없을지라도 ‘어떤 책임감으로 과거를 증언하며 현재를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을 텐데, 이는 오키나와 주둔 당시를 낭만적으로 회고하는 일본 장교와의 인터뷰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이들은 ‘일본군’의 입장에서 오키나와를 증언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행위를 두둔하거나 반성하며, 계급을 포함해 각자가 처한 상황을 스스로 해석하는 것에 따라 타인의 삶에 대한 무게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름을 보여준다.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로부터의 증언'의 한 장면.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로부터의 증언'의 한 장면.

한편, 오키나와에 있었던 ‘위안소’에 대해 오키나와 주민, 일본군, 조선인 군속, ‘위안부’ 당사자 여성의 기억 내지는 훗날의 태도가 각기 다르다는 점도 주목을 요한다.

특히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이리라 추측되는 조선인 군속과 ‘위안부’ 당사자 조선인 여성의 증언하는 ‘위안부’의 삶에 대한 가치 판단이 불일치한다는 점은 충격적이고도 인상적이다.

어떤 조선인 군속 생존자는 오키나와에 ‘위안부’ 여성들이 있었다고 말하면서도 핍박받는 삶의 동질감을 언급하기 보다는 ‘위안소’에 자신도 찾아간 적이 있다고 증언한다.

‘조선인’이라는 소속감보다 성별에 대한 위계가 더 앞서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속절없이 망연해 있자면, 산속에서 울고 있는 조선인 여성을 보고 ‘속아서 왔구나’ 싶어서 안타까운 마음에 화를 버럭 냈다는 다른 이의 증언이 이어지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위안부’ 생존자의 등장은 앞선 모든 증언을 압도하는 진실로 드러나는 듯 느껴진다. 다른 이의 기억 속에 부분적으로 존재하나, 타자화되거나 낭만화되는 방식으로 언급된 이가 지금 여기 살아있음으로 현재 자신의 삶 자체로 역사를 증언하고자 함에, ‘증언’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증언’은 단순히 당사자가 보증하는 역사적인 사실의 기술 행위가 아니라, 과거의 삶이 현재 어떤 모양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행위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실상 영화는 마지막의 이 ‘위안부’ 생존자를 향해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을 밝히는 것에 주안점이 찍힌 듯 보이는 ‘나’들의 증언은 공통의 기억 속에 놓여 있는 동시대인으로서 타인의 삶을 어떤 식으로 자기 삶의 문제로 다뤄왔는지 차원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이어 이 질문은 관객 앞에 던져진다. 영화로 나타나는 여러 입장의 증언을 듣는 관객은 증언자들을 역사적 사실을 자백하는 판정의 대상으로 올려놓는 일로 관람을 마치지 않는다. 관객은 한 시대의 생존자로서 가지는 증언의 무게라는 것이 그 삶을 뒤늦게나마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이끌어갈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목격한다.

그리고 이 삶을 목격한 자로, 우리 자신은 이들의 삶과 맞닿은 지금의 시간을 어떻게 이을 것인지 고민을 넘겨받는다.

이러한 삶의 이어받음에 대한 성찰은 이 영화를 넘어 현재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삶을 어떻게 취급해왔는지 떠올려보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

최근 신당역에서 벌어진 스토킹 범죄 살인사건 관련 여러 대응과 방안을 둘러볼 때, 타인을 타자화하며 사는 삶이 결국 어떤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지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우리는 이 시대를 어떤 삶으로서 증언하려는가.

이 영화로 성찰하는 삶의 중요한 원리는 바로 이것, 온통 자신의 삶만으로 증명되는 사실이 아닌 타인의 일을 자신의 역사 속에서 제대로 이해하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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