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세대에게 죽산 조봉암 정신 알릴 것”
“청년들, 죽산과 마주하는 속에서 거듭날 것”

인천투데이=김현철 기자│“민주·인권·평등·평화통일에 대한 ‘조봉암 정신’이 선대로 부터 우리 세대로, 우리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또 그 다음 세도로 이어져 모든 국민이 올바른 역사의식과 민주의식을 갖게해 분열한 대한민국을 하나로 통합하는 사업에 매진하겠다”

지난 31일 이모세 (사)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 죽산 조봉암 선생 묘역에서 진행한 죽산 서거 63주기 추모식에서 이같이 밝혔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간략하게 치렀던 추모식은 이날 3년 만에 정식 추모식 형태로 진행했다. 추모제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죽산이 1959년 7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11시에 시작했다.

정치권에선 이행숙 인천시 정무부시장, 김교흥(민주당, 인천 서구갑) 국회의원이 참석했고, 이재명(민주당, 인천 계양을), 박찬대(민주당, 인천 연수갑), 심상정(정의당, 경기 고양갑) 국회의원 등이 조화를 보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비엔 묘비문이 없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비엔 묘비문이 없다.

“죽산 정치적 고향 인천부터 다시 시작”

이세모 죽산기념사업회 회장은 “63년이 지난 오늘 선생의 명예회복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한을 풀기 위해 긴 시간 헌신한 당대 동지들이 대부분 떠났다”며 “(사법적) 명예회복은 됐으나 아직 남아있는 한은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국가유공자 서훈이 여전히 이뤄지지 않은 게 현실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슬픈 과거에 연연하지 않겠다. 마음을 굳게 다지고 죽산의 고향 강화, 제헌국회의원을 시작한 정치적 고향 인천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한 뒤 “청소년 대상 강연회를 확대하고 모든 세대와 모든 지역을 아울러 ‘조봉암 정신’을 알리겠다”고 덧붙였다.

지난 세월 국가유공자 서훈에 매달렸던 것에서 벗어나 ‘평화통일’과 ‘농지개혁’ 등 조봉암 정신을 미래세대와 공유하면 자연스레 죽산이 서훈 대상자로 오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이 회장의 판단이다.

앞서 기념사업회와 유족은 선생의 누명을 완전히 벗기 위한 마지막 절차라고 판단해 독립유공자 서춘 추서를 국가보훈처에 신청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이 일제강점기인 1941년 국방성금 150원을 냈다는 ‘매일신보’ 단신을 근거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은 상황이다.

선생의 묘비엔 선생의 묘임을 알 수 있는 '죽산 조봉암 선생 묘'라는 글 뿐이다. 묘비 뒤와 측면 어디에도 글자 하나 없다. 묘비문이 없는 것이다. 

기념사업회와 유족은 그런 묘비를 아무런 내용을 채우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훗날 정부가 서훈을 하면 그 때 새로운 묘비를 세울 방침이다. 선생의 억울함을 미래세대에 알리기 위함이다. 

조은주 청년활동가. 
조은주 청년활동가. 

“죽산이 남긴 큰 궤적을 더 많은 청년과 되새길 것”

이날 추모식에서 눈에 띈 점은 청년활동가의 추모사이다. 63주기 동안 청년이 추도사를 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죽산의 정신을 미래세대와 잇겠다는 이 회장의 약속과 맞닿는다.

조은주 청년활동가는 “지금, 현재,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빚진 세대이다”며 “현재는 과거의 결과임에도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당연하게 주어졌던 평화와 자유의 이면을 일상에서 쉽게 휘발시켰다”고 말했다.

이어 “불평등과 약극화, 기후위기 가속화, 스태그플레의션의 현실화 등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는 상황을 목전에 두고서야 선생의 사상과 철학을 뒤늦게나마 쫓아가려는 더딘 활동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목숨을 잃을 각오로 위험한 일터에 내몰린 청년, 사회복지 사각지대에서 고독사하거나 자살하는 청년 등을 보면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강조하며 복지사회 건설을 위해 혁신정치와 경제 정의 실천을 주장했던 선생의 사상과 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조 활동가는 “선생이 남긴 현대사의 큰 궤적을 더 많은 청년시민과 되새기고 확대하며, 멀고더 험한 대전환의 여정을 꿋꿋하고 늠름하게 걸어갈 것이다”며 “‘응시가 존재를 조각한다’는 말처럼 선생의 삶과 마주하는 속에서 청년들은 가치로운 존재로 거듭날 것을 약속한다”고 강조했다.

죽산 조봉암 선생 묘역. 

이승만 정부 초대 농림부 장관에서 사법살인 대상으로

죽산은 1899년 강화군 선원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며 독립운동에 눈을 떴다. 이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와 제1차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며 사회주의 계열 항일혁명가로 활동했다.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운 후 박헌영이 이끌던 조선공산당과 선을 그었다. 해방 후 인천을구(현재 부평, 계양, 서구)에서 제헌의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주도해 산업화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죽산은 강제로 땅을 뺏는 게 아니라, 지주에게 농지채권을 주는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지주들이 이 채권으로 땅을 살 땐 시중 가격의 30%밖에 쳐주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적산을 매입할 땐 채권 가격 그대로 인정해 줬다. 지주들은 정부로부터 적산을 매입했고, 이는 자본 축적의 토대가 됐다. 또한 농민들에겐 무상에 가깝게 토지를 공급했다.

죽산은 1952년 8월 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1956년 무소속으로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죽산은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를 노선으로 내걸고 30%가 넘는 지지율(=216만표)를 보였다. 이같은 지지를 토대로 죽산은 19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했다.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1958년 죽산에 간첩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죽산은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대법원에서도 같았다. 이후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재심 요청에도 불구하고 죽산은 교수형으로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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