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부평평화복지연대 김형회 대표

인천시가 지난 7월 19일부터 부평 미군기지 캠프마켓 중 부영공원에 위치한 일명 ‘부평땅굴’로 불리는 옛 일제 조병창 지하시설에 대한 정밀 조사를 시작했다.

인천 부평평화복지연대 김형회 대표
인천 부평평화복지연대 김형회 대표

현재 부평 캠프마켓 내부와 그 주변에 30여개의 지하호(지하공장)와 지하시설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정확한 현황이 파악된 것은 없다. 이제 막 공식 조사가 시작됐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했다. 일제는 대륙침략을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고 일본군 무기를 제조할 인천육군조병창을 현재 부평 미군기지에 지었다. 일제는 조병창에 조선인을 강제 징용해 소총, 탄약 등 각종 무기를 생산했다.

일본군 조병창은 일제가 패망 후 한반도 남측에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미군기지로 변했다. 처음엔 애스컴시티였다가 캠프마켓으로 바뀌었고, 지난 2020년 11월 미군한테 반환 받았다.

일제는 무기 제조에 필요한 노동력을 조선의 노동자와 어린 학생들을 강제 동원해 충당했다. 익숙하지 않은 작업환경과 반복적인 중노동은 빈번한 사고로 이어졌다. 작업 중 팔다리가 잘려나 간 어린 학생들이 조병창 내에서 치료받던 곳이 바로 현재 부평 캠프마켓의 1780 병원건물이다.

일제는 1941년 하와이 진주만 공습으로 중일전쟁을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확산했다. 일제는 일본 본토에 있는 무기공장을 미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본 내 무기공장의 조선 이전을 결정했다. 이전할 장소는 인천육군조병창이 있는 부평이었다.

그렇게 도쿄 제1육군조병창의 소총공장 등 일부가 조병창 북서면에 위치한 현재 함봉산 일대 지하에 들어섰다. 미군의 강력한 공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군기지와 그 주변에 30여 곳에 달하는 지하호는 바로 지하공장을 설치하기 위한 것으로, 여기에도 나이 어린 학생들이 한반도 각지에서 동원됐다.

만약 일제가 항복하지 않고 전쟁을 지속했다면 아시아태평양전쟁의 무기 공급을 준비했던 부평은 미국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을 것이다.

산곡동 함봉산의 지하호(지하공장)와 조병창의 지하시설은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끝까지 수행하기 위해 건설한 곳이다. 지하호와 지하시설은 규모와 활용도 면에서 차이가 있다.

지하시설은 지하 2층 규모다. 이중 지하 1층은 폭 7미터, 높이 3미터, 길이 최소 300미터에 달하는 큰 규모이다.

전문가에 따르면 일본 고쿠라 조병창에도 비슷한 규모의 지하시설이 있는데, 소총 성능시험장이었다고 한다. 이에 비춰 본다면 부영공원 내 지하시설도 이와 비슷한 용도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015년을 전후해 미군기지 토양오염 환경정화와 함께 지하시설에 대한 조사가 일부 이뤄졌다. 지하시설 안으로 150미터 가량 들어갔지만 안전 문제로 진입이 어려웠다. 조명을 비췄는데, 300미터 지점에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고 했다. 철문이 지하시설의 끝인지 더 이어져 있는지는 아직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알 수 없다.

조병창의 지하시설과 함봉산의 지하호는 현재까지 밝혀진 실체적 규모와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다크(dark) 유산(아픈 역사를 간직한 역사문화유산)으로 가치가 높다. 세계적인 역사관광 다크 유산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근대 역사문화 유산은 부산, 대구, 목포, 군산 등에서 보듯이 인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조병창 시설의 존치를 단순히 역사 유적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다. 조병창 시설의 원형 보존을 주창하는 것은 역사적 가치를 넘어 참혹했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과오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전 인류가 기억하고 계승할 교육공간으로 손색없기 때문이다.

※ 외부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