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최근 인하대학교 재학생이 학교 건물에서 추락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현재 수사 중인 이 사건을 어떻게 언급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사실로 입증된 최소한의 것을 위주로 위와 같은 문장을 써보았다. 그런데 이 문장은 사건의 결과를 지시하는 것이지만 내막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어떻게 다시 서술할 수 있을까?

“최근 인하대학교에서 한 재학생이 동급생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고 학교 건물에서 추락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다시 쓴 문장에는 사망한 피해자가 어떤 연유로 건물에서 추락하게 됐는지 정황을 헤아릴 수 있는 몇 가지 근거가 언급돼 있다.

이 문장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추락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관돼 있을지는 더 살펴져야 하지만(이를테면 폭행에 저항하다가 가해자에 의해 고의적으로 추락하게 된 것인지에 대한 여부 등) 최소한 폭행 상황과 추락이라는 결과가 모종의 인접성을 띠고 있으며 나아가 인과성을 가질 가능성 또한 있고 이 과정에 피해와 가해라 할 만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좀 더 헤아려보건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최근 인하대학교에서 한 재학생이 동급생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고 학교 건물에서 추락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여성이며 가해자는 피해자의 지인으로 알려진 남성이다.”

첫 문장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성별을 밝히는 문장을 덧붙였다. 피해 여성과 가해 남성의 구도를 고착화할지도 모르리란 지나친 우려를 예상하면서도 성별을 밝혀 적은 까닭은 우선 이것이 밝혀진 사실 중 하나이기 때문이고, 이 사건이 발생하고 다뤄지는 과정에서 성차에 대한 현 사회의 이해 수준이 반영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인하대 추락사 사건을 막 보도하기 시작할 무렵 대다수 언론이 사용한 언어에 문제가 많았다. 피해자 발견 당시를 언급하는 기사 제목에 선정적 표현이 사용됐기 때문인데 이는 사회에서 ‘여성’을 사건화하는 고질적이고도 문제적인 방식이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초기 다수 언론의 보도 방식은 국민의 공분을 샀다.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점에 기초해 대상화하는 기사의 특정 표현들은 피해자에 대한 언론의 비윤리적 가해의 일종이라 비판받았고 곧 다수 언론의 보도 방식이 문제화되었으며 이에 선정적 문구를 수정하는 방식으로 후속 기사가 발표됐다.

이 과정에서 한겨레는 인상적인 ‘고백’을 했다. 한겨레는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신문윤리실천요강 제3조 보도준칙에 따르면 ‘범죄·폭력·동물학대 등 위법적이거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보도할 때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저속하게 다뤄서도 안 된다’고 선정 보도를 금지하고 있다”고 언급하며 한겨레 또한 해당 사건과 관련한 초기 기사에 선정적 표현을 사용했고 곧 바로잡았음을 시인했다.

이는 여성이 사건화돼 다뤄질 때 손쉽게 ‘OO녀’라는 타이틀로 언급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어떤 사건이든 여성이 사건의 주요 관계자로 언급될 때, ‘특정한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누구이며 특징이 어떠한가의 측면이 아닌 ‘그 여성’이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발견됐는가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히 성차별적인 시선에 의한 언어화의 방식이다. 사회의 현안을 정확한 언어를 통해 보도해야 할 의무가 있는 언론에서조차 이런 성차별적 용어를 공공연하게 써내고 있는 한 그 영향이 독자들에게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이런 용어가 시시각각 노출되는 한 그것을 보는 어떤 개인은 손쉽게 그러한 정서를 습득하게 된다.

모든 게 언론의 탓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이자 언론인으로서 지니는 공공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그 책임이 무거움은 충분히 강조돼야 한다.

이에 더해 언론인을 포함해 이러한 현안을 살피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에서마저 ‘숨 쉬듯’ 성차별과 혐오를 하고 있지 않은지, 최소한의 자기 검열을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기도 하다.

방금의 이야기는 한 명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의 경험과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문해력을 기르기 위해 기사 읽기를 독려 받았던 청소년 시절을 지나 자연스럽게 기사를 찾아 읽게 된 어느 성인기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공적 보도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분명 나의 사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만 쓰여 있는 그대로 주워섬기지 않게 된 것은 특정 표현이 특히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 이런 방식으로 보도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접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여성의 사건화에 가담하는 2차 가해와 다를 바 없는 주변의 반응, 이를테면 피해자 여성에게도 잘못이 있다거나 한없이 조심해야 한다는 말들은 나 또한 한 명의 여성이기에 성장하는 내내 들어야 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건이 사건화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사건에서건 ‘여성’이 사건화되는 일은 어쩌면 이 사회가 이미 성차별적인 언어로 오염된 속에서 시민을 양성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혐오 표현을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어른들의 말을 아이들이 배우고 그런 표현이 일상어로 자리잡은 채 아이는 성인이 된다. 혐오 표현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특정한 시기가 있을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인하대 추락사 사건을 겪으며 학교는 젠더 및 성인지 교육에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 이는 단연 필요한 조치다. 성인지 감수성을 발달시킬 수 있는 교과 커리큘럼의 제작은 공동체의 일원을 제대로 인식하고 젠더 혐오를 걷어내는 하나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단발적이나마 의무적 교육의 실시 또한 그것이 ‘의무’인 만큼 이 시대의 시민 윤리로서 갖춰져야 할 덕목으로서 젠더에 대한 이해를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인하대 만의 조치여서는 안 된다. 수십 년 동안 의심도 반성도 없이 살아왔는데 특정 시기가 되어서 몇 번의 교육을 받음으로 해서 내재한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수업을 받고 의무 교육을 받는 것은 최소한의 요건이다. 좀 더 일상적인 수준에서 젠더를 사건화하는 사고의 방식을 의심하고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때 ‘일상적 수준’이란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성별이 아닌 사안의 경중에 따라 정당한 수사와 판결이 내려진다는 사례의 축적도 포함된다. 공적으로 올바른 해결이 올바른 시민 의식을 구축할 수 있다.

또 여성의 죽음이 보도돼 슬프고 참담하다. 시민이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민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인하대 추락 사건의 매듭이 지어지는 순간까지 모두가 책임지는 자세로 지켜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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