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나현 서울시립동작청소년성문화센터장

윤나현 서울시립동작청소년성문화센터장
윤나현 서울시립동작청소년성문화센터장

인천투데이|며칠째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대학생, 성폭행, 심정지, 추락사 등으로 시작된 사건 보도는 준강간치사, 증거인멸, 불법촬영 등에 대한 추가 보도로 이어지고 있다. 믿기 힘든 사실들로 인한 정신적 충격과 2차 가해에 가까웠던 초기 사건 보도는 많은 이들을 분노하게 했다.

일단 사건의 윤곽은 잡힌 듯하나, 공식 발표는 아직이다. 언론에 의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날 피해자는 대학생으로서 평범한 하루를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무더위 속에 여름 계절학기를 수강했고 기말시험이 끝난 뒤 친구와 술자리를 가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이 다니던 학교에서 홀로 피 흘리며 쓰러진 채 발견돼 급작스레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은 보통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건과 관련해 납득하기 힘든 정황, 행위 등이 많다 보니 많은 이들이 이를 따져보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피해자가 사망한 상태에서 섣부른 추측이나 판단은 사건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고인과 유가족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경찰이 가해자를 구속수사 중이니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며 진실이 밝혀지길 기다려야 한다.

대신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이 사건을 충분히 애도하는 일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 느끼는 슬픈 감정’이라고 한다. 즉, 상실의 자연스런 결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기사에 따르면 “애도란 장례를 치르는 것”과 비슷하며 “우리가 어떤 죽음에 대해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감정적 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애도는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슬픔을 실천하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우리 사회는 그나마 안전하다고 믿었던 대학이 절대 안전하지 않음을 알게 됐다. 수백 대의 CCTV는 폭력을 막아주지 않으며 공동체 구성원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경비와 순찰 강화 역시 도움이 될 수 있으나, 폭력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폭력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해자가 폭력을 행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 사건이 더욱 충격적이었던 건 친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이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음을 다시 일깨워 준 점일 것이다.

2010년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초‧중‧고교생에게 의무화된 성폭력 예방교육의 경험 덕분인지, 교육 참여자들에게 가해자가 피해자와 어떤 관계였을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어떤 것인지 질문하면 열이면 열 “아는 사람이요”라고 대답한다. 이는 성폭력에 관한 통계가 작성된 이후 변치 않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쉽게 성폭력은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거리를 둔다. 어떤 경우에는 성폭력 예방교육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며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지 말라”고 항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폭력을 ‘어두운 골목에서 낯선 이에 의해 벌어지는 우발적인 일’ 쯤으로 치부하면 우리의 일상은 절대 달라지지 않는다.

놀랍게도 성폭력에 대해 사람들은 모순된 태도를 보이곤 한다. 먼저 성폭력 사건이 벌어지면 가해자에 대한 엄청난 비난이 쏟아진다. 언론에서 가해 행위를 ‘몹쓸 짓’, ‘짐승 같은’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온라인 댓글은 어떠한가. ‘사형시켜야 한다’는 댓글이 베댓(베스트 댓글)이 되고 사건을 공유하는 수많은 대화방에서 가해자를 향한 욕설이 서슴없이 나온다.

성폭력에 분노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성폭력을 ‘일부 정신 나간 가해자들의 일탈’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인간의 탈을 썼지만’ 인간이 아닌 이들의 병리적 문제(이상성욕, 분노 조절 실패)로 축소돼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이다. 피해자들이 말하는 가해자는 병리적 문제를 갖고 있던 소수의 낯선 사람들이 아니라 ‘아는 사람’ 즉, 일상을 함께 살던 평범한 사람들이다.

시험이 끝나고 술 한잔 기울이던 친구, 선배, 후배 이런 사람들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찰 강화나 CCTV 설치 등이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성폭력, 대학 내 성폭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남성이 주도하던 대학 공간에 여성들이 진출하면서 성폭력은 시작됐고 오랜 시간동안 문제가 되고 있다.

지금은 사라진 혼숙, 술 강요, 여학생 기숙사 침입에서부터 게임을 가장한 성추행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문제가 된 단체톡방 내 성희롱, 불법촬영, 데이트 폭력 등도 이러한 연속선상에 있다.

이러한 공동체 내 성폭력은 필연적으로 권력관계와 조직문화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해결을 위해선 이에 대한 진단과 비판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 내 권력관계, 즉 성별, 나이, 지위, 신체 차이 등을 이유로 만들어지는 불평등에 대한 사유와 그간 허용했던 문화 안에 숨겨진 폭력성을 찾아내는 과정이 돼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바로 그 안에서 약자인 사람, 불편함을 느낀 사람, 고통을 참아왔던 사람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고통은 말할 수 있을 때 찾을 수 있고 차별은 발견돼야만 사라지게 할 수 있다. 폭력의 고통을 말하는 이에게 그건 폭력이 아니라고 부인하거나, 오히려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 속에서 성폭력은 정당화되고 반복된다.

성폭력은 성을 매개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에 반해 상대를 제압하고 고통을 초래하는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폭력의 책임은 가해자에게 물어야 하며 공동체는 도움과 지지로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야 한다.

공동체 내 성폭력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폭력을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훼손하는 ‘인권침해’로 다뤄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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