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걷기여행 (29) 전라남도 목포

▲ 전라남도 목포시의 일부분.
지난달 28일부터 29일까지 1박2일간 교육문예창작회 여름연수 참석차 목포에 다녀왔다. 후배 시인 이봉환이 무안에 지은 집에서 모인다고 해서 집 구경도 할 겸 겸사겸사 다녀왔다.

교육문예창작회라는 단체가 ‘있었다’. 하기야 지금도 있지만, 그래서 여름연수도 다녀왔지만, 난 굳이 ‘있었다’라고 쓰고 싶다. 전교조와 함께 나의 젊은 시절을 함께 견뎌 낸 단체였다. 1989년 전교조가 결성됐고, 교사 1500여명이 해직됐다. 해직교사 중에는 학교에 근무하면서 글도 쓰는 이른바 교사문인들도 많았는데, 그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가 바로 교육문예창작회였다.

그 시절, 실제로는 고생 무지 했는데 이상하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나간 시간은 아무리 어려웠어도 모두 추억이 되는가? 김진경ㆍ도종환ㆍ안도현 시인 등이 모두 이 단체 출신이다. 당시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은 교사문인들의 장례를 지내는 일이었다.

해직 기간 중에 회원이 3명이나 죽었다. 복직도 못하고. 정영상 시인은 심장 마비로 죽었고, 신용길 시인은 위암으로 죽었고, 오송회 사건의 이광웅 시인은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 오송회 사건은 1982년 군사정권에 의해 탄압받던 교사의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다. 군산제일고의 전ㆍ현직 교사들이 모여 시국토론을 하고 4·19와 5·18 희생자 추모제를 지내던 모임이 이적단체가 됐다. 경찰은 다섯 명(오)의 교사가 소나무(송) 아래에 모였다고 해서 ‘오송회’라는 이름을 붙였고 고문을 통해 이들을 용공분자로 만들어 냈다.

2011년 11월 10일, 대법원 3부는 오송회 사건 피해자 3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국가가 150여억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서럽고도 서러운 시절이었다. 그랬던 교육문예창작회가 이제 여름과 겨울 1년에 두 차례 모여 그냥 얼굴이나 쳐다보고, 농반 진반 수다나 떨다가 헤어진다. 전교조 경북지부장으로 펄펄 날던 조영옥 시인은 손녀딸을 둔 할머니가 되었고, 배창환 시인은 머리카락이 거의 없다.

▲ 목포 대교.
인천에서 목포까지 고속버스로 4시간 20분, 멀다. 하기야 중국에서는 그 정도의 시간이면 아주 이웃이지만 여기는 중국이 아니니까. 버스 맨 앞자리에서 자다가 깨다가 졸다가 했다. 하늘이 맑다. 수도권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맑은 하늘의 뭉게구름이 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8시께 터미널에 내렸다. 해도 이미 졌다.

약속 장소인 카페 ‘노인과 바다’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기사님의 표정이 밝지 않다. 수도권도 그런데 하물며 지방에서 택시를 모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택시 안에서 간단한 브리핑을 들었다. 목포 인구에서 시작해서 최근 이 지역 정치인의 향후 전망까지. 목포 인구는 27만에서 28만 사이이다. 인천 인구의 10분의 일이다.

도착해보니 카페가 아니라 북항 목포해양대 옆 모래사장에 모여 있다. 원래 대반동해수욕장이었는데 유원지로 바꾼 곳이다. 전날부터 모인 축들은 벌써 약간 지쳐 보이는 상태. 맥주 한잔씩 하면서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박두규 시인의 ‘부용산’은 언제 들어도 절창이다. 경관조명을 밝힌 다리의 야경이 아름답다. 목포대교란다. 아, 언론에서 본 것 같다. 원래 목포 북항이 서해안고속도로의 종착지점인데 목포대교가 생김으로써 서해안고속도로는 완도와 해남까지 연결됐다. 6월말 완공식을 했으니까 꼭 한 달 됐다.

예술인촌이 있는 무안군 월선리

자리를 옮겨 무안군 월선리로 들어갔다. 월선리는 예술인촌이 있는 마을이다. ‘월선’이라는 마을 이름은 도선국사가 이 마을을 보고 지은 시 ‘구름 속에 달을 가두고 신선은 독서를 한다(雲中囚月 仙人讀書)’에서 두 글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밖에서는 잘 안 보이는데 안에 들어오면 넓은 마을이 쫙 펼쳐지는, 여성의 자궁을 닮은 비처라고 한다.

월선저수지에 올라가서 술 한 잔 더 했다. 상현달이 저수지를 비추고 달빛 속에서 술 한 잔 기울이니 신선이 따로 없다.

일행은 이봉환 시인 댁으로, 나와 김경윤 시인은 박관서 시인 댁으로 나누어 갔다. 박관서 시인은 코레일에 근무하는 시인으로 첫 시집 제목도 ‘철도원 일기’다. 교육문예창작회 회원은 아닌데 나와 같은 출판사에서 시집을 낸 인연으로 형 아우로 친하게 지내고 있다. 몇 년 전 월선리에 한옥을 지었다. 그런데 집이 무슨 미술관 같다. 역시 예향 목포의 예술인답다. 강금복 화백의 족자 작품까지 선물로 받았다. 황공하다. 그림도 좋지만 매화는 일생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글씨도 좋다.

아침에 일어나니 지난밤에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던 한옥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서재에서 저수지와 저수지 너머 산이 바라다 보인다. 이런 집에서도 싫증이 날까? 다시 와서 며칠 푹 쉬었으면 좋겠다.

이봉환 시인 집으로 갔더니 한옥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2층 다락방 서재에서 내다보이는 산이 정말 부럽다. 어린 시절 우리 모두 꿈꾸던 장면, 다락방에서 턱을 괴고 밖을 내다보는 꿈이 현실에 실현된 것 같다. 집 한 채 지어야 어른이 된다는데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올까?

목포근대역사관

▲ 목포근대역사관에 있는 금고.
목포 시내로 나와 아침을 먹었다. 호남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지만 아침을 먹은 ‘돌집’ 백반도 차림은 거의 한정식 수준이다. 옛 시가지에 있는 원조백반전문점 ‘돌집’은 목포에서도 특히 유명한 집이다.

일행과 헤어져 목포 투어를 시작했다. 김경윤 시인이 도와주었다. 내가 그의 첫 시집 발문을 쓴 후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는데, 그도 나처럼 불의 시대를 함께 건너온 시인이다.

고향 해남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학년부장을 하면서 광주전남 작가회의 회장에 해남의 김남주 시인 기념사업회 회장 등, 갖가지 지역 일에 관여하고 있다. 나의 처지와 흡사하다.

목포근대역사관으로 갔다. 목포 근대사와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담긴 사진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일제 수탈의 대명사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을 리모델링해서 개관했다.

예전에 금고로 쓰던 방도 남아 있었다. 인천근대사박물관에 있는 금고와 흡사하다. 금고의 두께로만 보면 일제는 아마 조선을 수백 년 동안 식민지로 삼을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렇다 할 유물은 없는 대신 충격적인 사진들이 많았다.

인천이나 목포나 일제강점기 치욕의 역사가 이제는 차분히 뒤돌아봐야할 역사학습장이 되었다. 목포에는 이곳 동양척식주식회사 말고도 호남은행 목포지점, 양동교회 등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일제강점기 건물이 9곳이나 된다.

유달산 노적봉

▲ 유달산 노적봉.
목포에 왔으니 목포의 상징 유달산에 안 올라 볼 수 없었다. 유달산은 노령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한반도 최서남단에 위치한 산이다. 유달산 올라가는 풍경이 꼭 인천 자유공원을 닮았다. 유달산은 봄에 만발한 개나리가 유명하다는데, 이날은 꽃이고 뭐고 너무 더워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날씨는 더웠지만 하늘은 무척 맑았다. 파란 하늘과 흰 뭉게구름이 어우러진 이날의 하늘 풍경은 중국 내몽골이나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하늘이었다.

유달산 공원 입구에서 노적봉이 맨 처음 우리를 맞아준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적을 물리치기 위해 이 노적봉을 짚과 섶으로 둘러 군량미가 산더미같이 쌓인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는 봉우리로 유명하다.

노적봉 맞은편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 있는데,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 동상이 너무 가벼워 보이고 옆으로 약간 기운 느낌마저 든다. 장군 동상 바로 뒤에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서 있다. 한국 최초의 노래비다. 노래비에서 이난영의 노래가 계속 흘러나온다.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향토가요가사로 당선된 노랫말에 곡을 붙였다.

‘목포의 애국가’로까지 불리기도 하는 ‘목포의 눈물’, 이난영은 목포 출신인데 목포에 관한 이난영의 노래는 이것 말고 ‘목포는 항구다’가 또 있다. 전 국민이 아는 목포에 관한 노래가 두 개씩이나 있는 목포시민은 행복하다. 전 국민이 아는 인천노래는 뭐가 있나? 연안부두? 노래의 힘은 참으로 대단해서, 만일 ‘목포의 눈물’이 없었다면 유달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나란히 놓인 섬 3개의 이름이 ‘삼학도’인줄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은 3개의 섬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목포역 앞 중앙로 ‘빛의 거리’

▲ 중앙로 ‘빛의 거리’.
날이 맑으니 목포 시내가 참으로 깨끗하다. 오포대가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포탄 없이 화약만 넣고 포를 쏘아, 시민들에게 정오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대포다.

팔각정에서 숨을 돌리고 국도 1, 2호선 기점으로 갔다. 국도 1호선은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2호선은 목포에서 부산까지를 말한다. 신의주까지 939km, 이 길을 계속 달려 신의주까지 가볼 날이 과연 우리 세대에 올까?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중국 단둥으로 가서 압록강 건너 바라보던 그 신의주 말이다. 이 장소의 상징성 때문에 행사가 많이 열린다.

국토종단행사는 꼭 이곳에서 시작하거나 마친다. 비석 뒤에 있는 빨간색 벽돌 건물이 옛 일본영사관이다. 목포 최초의 서구식 건물로 1900년 완공됐다. 목포의 근대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고 큰 건물이다. 일본인 거주 지역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위치다.

목포역 앞 중앙로 ‘빛의 거리’를 지나갔다. 밤이면 형형색색의 불빛을 밝힌 조형물들이 화려한 야경을 선보인다. 일제 때 이곳은 일본인 거주지(유달동)와 한국인 거주지(북교동·죽교동)의 경계 지역이었는데 상권이 발달하면서 일본 상인들과 대립하던 곳이다. 우리나라 상인들을 보호해주면서 자연스럽게 목포 ‘형님’들 세력이 처음 태동된 곳이다. 유독 목포 ‘형님’들의 민족의식이 왜 강한지 알겠다.

전날 야경으로만 봤던 목포대교를 직접 건너보기로 했다. 개통된 지 한 달밖에 안 돼서인지 통행하는 차량보다 우리처럼 차를 세워 놓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목포의 시조인 학을 형상화했다는 대교도 아름답지만, 다리에서 내려다본 한려수도도 아름답다. 하늘과 산과 바다 셋 중 아무도 잘난 척하지 않고 각각 자신의 모습을 유지한 채 적당히 어울리고 있다.

카페 ‘노인과 바다’에 가서 커피 한 잔 했다. 원래 카페 이름이 ‘헤밍웨이’였다고 하는데 이름을 못 쓰게 해서 바꿨단다. 누가 못 쓰게 했지? 헤밍웨이의 후손들이? 목포까지 와서?

목포문학관에서 갓바위까지

▲ 목포문학관.
남항 부근 입암산 자락 남농로에 있는 목포문학관으로 갔다. 목포 출신 문학인 4명, 박화성, 차범석, 김현, 김우진를 한꺼번에 모셨다.

1층에 박화성과 차범석, 2층에 김현과 김우진의 문학관이 있는데 김현 선생의 전시관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유품 전시관을 어둡게 해놓고 사람들이 들어오면 불이 저절로 켜진다. 유품에 가까이 다가가면 또 불이 더 들어오는 식이다.

희곡 작가 김우진은 ‘사의 찬미’를 부른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함께 정사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래도 그의 아버지는 그의 혼을 불러 들여 시신 없는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지난밤에 가본 월선리 뒷산에 김우진의 가묘가 있다.

남농로에는 목포문학관을 비롯해 목포문화예술회관ㆍ목포자연사박물관ㆍ국립해양유물전시관ㆍ생활도자기박물관ㆍ남농기념관ㆍ문예역사관 등 대형 문화예술 전시관이 모두 한 곳에 몰려 있다.

전시관 거리 끝에서 오른쪽 바닷가로 들어갔다. 천연기념물 제500호로 지정된 갓바위다. 바닷가 주변 바위들이 풍화와 해식작용으로 삿갓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이다. 주민들은 그동안 갓바위가 삿갓을 쓴 중을 닮았다 해서 ‘중바우’로도 불러왔다. 갓바위 앞바다 위에 나무다리를 설치해 바다 쪽에서 갓바위 모습을 감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마치 갓을 쓴 두 사람이 함께 앉은 모습이다. 대만 야류의 여왕상과 비슷하다.

목포 5미(味)의 하나 민어회

▲ 갓바위.
돌아다니다보니 점심이 늦었다. 민어회를 먹으러 갔다. 목포에 가면 꼭 맛봐야한다는, 목포 5대 맛난 음식 중의 하나다. 목포엔 항구도시답게 해산물이 지천인데 홍탁삼합ㆍ민어회ㆍ세발낙지ㆍ먹갈치ㆍ꽃게무침 등 이른바 ‘목포 5미(味)’도 모두 해산물이다. 민어회는 쫄깃하다. 술을 안 먹어서 그런지 민어회 맛이 덜하다. 해직 시절 먹었던 보신탕보다 열 배나 비싼데도 보신탕 맛에 못 미친다. 배가 불렀나?

평화공원으로 갔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해 만든 광장이다. 작은 동네에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훌륭한 대통령을 배출했다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밤에는 바다에서 ‘춤추는 바다 분수’라는 불꽃쇼가 열리는 곳이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 돌아다니기가 너무 어렵다. 목포를 떠나야할 시간도 다가온다.

목포란 이름은 중요 길목, 요충지 포구를 뜻한다. ‘그 가게의 목이 좋다’ 할 때의 그 ‘목’이다. 당시 일제는 호남평야의 곡식을 반출하기 위해 호남선 철길을 놓고 목포 항만시설을 확충하는 등 목포를 ‘개발’했다. 목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인천과 비슷한 점이 많다. 항구도시이고, 일제 수탈의 현장이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일제 수탈의 현장이 그대로 남아 근대문화유산의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목포는 인천처럼 근대문화유산 박물관, 근대문화유산의 보고로 불린다. 근대는 근대지만 ‘슬픈 근대’다.

목포를 돌아다니는 내내 뭔가 낯익고 불편하지 않았다. 하기야 목포뿐만 아니라 호남지방은 대체로 그렇다. 음식도 사람도 세계관도. 주마간산으로 훑어본 목포. 다음에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다녀봐야겠다.
▲ <글ㆍ사진> 신현수 시인ㆍ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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