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철 참여예산센터 소장

최계철 참여예산센터 소장
최계철 참여예산센터 소장

인천투데이|중국 진(晉)나라 시대에 개자추라는 인물이 있었다. 주군(文公)이 정변으로 19년간이나 망명생활을 했을 때 지근에서 보필했다. 한 신하의 배신으로 모두 굶주림에 시달리자 개자추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주군을 공양했다.

세상이 바뀌어 주군이 왕이 되고 논공행상이 있었다. 개자추는 노모를 돌보느라 당선 축하연 쯤 되는 자리에 불참하게 됐는데 결국 공신으로서 누려야할 자리를 얻지 못했다. 3년을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자 노모를 데리고 산속으로 은거했다.

포상에 빠진 것이 원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서로 공을 탐하는 모습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너도 공을 세웠는데 왜 상을 달라고 하지 않느냐고 노모가 묻자 “신하는 자신의 죄를 오히려 의로운 행동이라 하고, 군주는 간사함에 상을 내리면서 상하가 서로 속이고 있으니 함께 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나중에 이를 뉘우친 문공이 그를 찾아 산에서 내려오라 했지만 거부했다. 불을 지르면 내려오겠지 하고 온 산에 불을 질렀다. 3일 뒤 산속의 타버린 버드나무 밑에서 노모를 끌어안고 죽은 개자추를 발견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도연명을 숭상한다. 인류 최초의 전원시인이라서 안빈(安貧)의 사상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의 정신이다. 일개 현령(읍장 정도의 직위)이 군청 정도의 상급기관에서 나온 감독관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며 직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갔다.

그는 가난해 자식들이 끼니를 굶을 지경이었다. 감독관의 사람됨이 옹졸하고 인품이 방자하며 탐욕스런 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저 참고 허리한번 굽히면 자리보존은 물론 처자식도 건사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마다하고 스스로 거친 들판으로 돌아간 그 용기와 정신을 우러르는 것이다. 굶주림 앞에서 애써 구한 벼슬을 버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용기인 것이다. 조선시대에 남명 조식 또한 벼슬을 초개처럼 여기고 살다갔지만 그는 사대부집안으로서 식솔들을 먹이고 문화생활을 하는 데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조선 말 황현이라는 처사는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했는데 아무도 자책하지 않는다면서 절명시를 남기고 죽었다. 진사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하고도 부패한 관료사회를 겪고 낙향한 처사였다. 벼슬에 연연하지 않은 용기가 있었다.

언사소라하여 부정부패해소와 국정개선의 방책을 제안했다. “어진 이를 친하게 지내고 간사한 이를 멀리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사용함을 절약하여 신상필벌 하는 것을 본(本)으로 하라”는 그의 소(訴)는 물론 전달되지 않았다.

전달된들 일개 처사의 국정개혁 하소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고관대직을 지낸 이들의 이름은 몰라도 역사는 황현을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기억한다.

정권이 바뀌고 지방수장들도 대폭 교체되면서 주군을 따라 헌신했던 공신들에게 주는 이른바 논공행상의 바둑판 작업이 분주하다. 주군의 입장에서는 챙길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자리가 부족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서로 공이 있다고 하니 임기 내내 나오는 자리를 채워도 부족할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교차하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주군을 지켜준 것이 과거의 공신이다. 말하자면 위사전망공신(衛社戰亡功臣)이다. 공(功)을 탐하면 비굴해진다. 유세장에 몇 번 따라 나섰다고, 캠프에 이름이나 걸어놓고 얼굴 몇 번 비쳤다고 나도 공신인데 하며 자리를 기웃거린다면 이 또한 부끄럽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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