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섭 인천문화재단 평화교류사업단

인천투데이|여기 사진이 하나 있다. 1954년 한국전쟁 직후 미군에 의해 촬영된 사진은 아직까지 닫혀지기 전의 바다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이다.

1954년 인화진과 인화성마을 항공사진(ⓒ국토지리정보원)
1954년 인화진과 인화성마을 항공사진(ⓒ국토지리정보원)

강화도 북서쪽 끝자락의 인화리는 예로부터 강화와 교동을 잇는 인화진(寅火津)이 있던 곳으로 교통의 요충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곳은 인화리 인화성 마을 어민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인화성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1970년대 초까지 인화진은 어선으로 붐비던 곳이었다고 한다. 마을 전체 50호 중 대략 14~15가구가 어업에 종사했으며 선주는 16명이었다. 또 어선은 20여척이 조업에 나섰다고 하는데 조기잡이에 사용된 중선, 새우잡이에 사용된 곳배, 안강망배의 일종인 꽁달배(꽁댕이배) 등 인화진 해안에 정박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인화성 마을에선 매년 그믐날 배고사를 지냈으며 3년에 한 번씩 포구의 뒤편 상산의 범바위에서 크게 굿판을 벌이고 항해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했다. 이렇듯 인화진과 인화성 마을은 풍요로운 한강하구에 의지해 살아온 마을이다.

앞서 살핀 사진에서도 이러한 마을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인화진 해안으로 크고 작은 선박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은 물길이 닫히기 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음 사진을 보자. 마름모꼴의 석재를 면맞춤 해 부두를 쌓아 놓은 이곳은 연미정 아래 위치했던 월곶항의 흔적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도 포구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명확하지는 않다.

월곶항 부두잔교와 계단 모습(ⓒ정민섭)
월곶항 부두잔교와 계단 모습(ⓒ정민섭)

다만, 일제강점기 들어서 월곶항으로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강화에서 서울 마포, 인천, 연백으로 이어지는 항로의 기착지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1929년 강화에 본사를 둔 삼신기선주식회사가 월곶과 경성 간 기선을 운항하면서 월곶항은 더욱 번성한다. 경성에서 생산된 공산품과 개성의 인삼 등이 월곶항을 통해 들어왔고 들어온 물자들은 다시 강화읍 시장으로 나갔다.

이러한 물류기능이 확대되면서 월곶항 주변 주민들의 생업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월곶항의 배후 월호마을은 대략 100가구가 거주했다고 하는데 이중에 자기 소유의 전답을 가진 일부만이 농사를 지었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월곶항에서 가대기(창고나 부두에서 쌀가마니 등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매고 나르는 일)로 생계를 해결했다고 한다.

이렇듯 월곶항은 한강하구의 물길을 따라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교차지점이자 결절점이었으며 마을 주민의 생업 현장이었다.

그러나 위 두 사진에 나타나는 인화진과 월곶항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한강하구가 닫힌 물길이 된 까닭이다. 물길이 닫혀버리자 사람들도 더 이상 고향에 머무를 수가 없게 됐다.

인화성마을의 어업은 휴전 이후 서해접경지역에서 일어난 잦은 어선 납북사건 등으로 어로한계선이 설정되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바다를 터전으로 삼던 어민들은 인근의 창후항이나 멀게는 인천으로 이주했고 풍어를 기원하던 범바위의 굿과 제사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많은 화물과 사람들로 북적이던 월곶항과 월호마을도 더 이상 하역업에 종사하지 못하게 되자 많은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두 마을 모두 한적한 시골마을로 변했다.

오는 6월 29일은 인천의 서해접경지역에 어로한계선이 설치된 지 58년이 되는 날이다. 한강하구 중립수역 설정에 뒤이은 조치로 강화도의 접경지역에서 번성했던 포구들은 완전히 사라졌고 포구를 품은 바다는 금족의 공간이 됐다.

그러나 현실이 이렇다 하더라도 평화를 향한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과거에 일상적으로 평화롭게 드나들던 이곳의 기억을 기록하고 언젠가 이뤄야 할 일상의 회복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만 평화의 바다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내년이면 한국전쟁이 정전된 지 70년이 된다. 비록 한강하구 중립수역에 들어가기는 어렵겠지만 염하를 통해 어로한계선을 지나 월곶항에 이르는 항로를 복원해 보는 것은 어떨까.

60년 가까운 시간동안 금단의 바다였던 곳을 다시 가게 된다면 다시 평화의 바다를 꿈꾸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꿈들이 모인다면 다시 물길을 열고 평화로운 바다를 만들 수 있지는 않을까 기대한다.

※ 외부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