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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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만석 우회고가교’가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1989년에 공사를 시작해 1993년에 개통됐고, 내년까지 철거를 끝낸다고 하니 햇수로 29년을 버텼다. 이 고가교 위에는 넘겨다볼 바다가 있고, 아래에는 디딜 수 있는 철길이 있다. 이제 이런 풍경을 보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과거 만석동에는 대우중공업 공장 등과 연결된 전용철도선이 있었다. 만석 우회고가교는 이 노선을 따라 만들었다. 그래서 고가교가 지나는 ‘신 만석도로’와 옛 철길의 흘러가는 모습이 비슷하다.

만석 우회고가교가 건설될 무렵 인천은 안팎으로 분주함에 들썩였다. 수도권 외곽순환고속도로는 착공, 남동공단은 단계별 준공, 송도 앞바다는 매립 계획이 추진되던 즈음이다. 게다가 1991년에는 인천국제공항과 북항 개발 사업이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소련이 해체될 때니 북방교역에 대한 희망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1989년에는 월미도 문화의 거리까지 개장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천이 제2의 개항을 맞는다는 술렁임도 있었고, 비로소 서해안 시대가 시작했다는 기대 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그때 인천은 산업발전은 물론, 관광도시로 도약까지 전망하던 시점이었다.

만석 우회고가교는 도심지로 진입하는 화물차들을 우회시킬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주변 도로를 함께 정비하면서 자유공원, 올림푸스호텔, 월미도를 잇는 관광도로 확보도 고심했던 모양이다. 만석동 일대가 불량지구로 지목되며 철거와 이주가 강제된 것도 이때쯤이다.

만석 우회고가교 건설로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건 흔히 괭이부리마을이라고 부르는 만석동 2번지 일대의 일명 ‘월남 피난민촌’이다. 흔히 그렇게 부를 때도 있지만, 이곳은 이촌향도의 유행 속에서 공장 지대를 찾아 이주한 이농민들의 정착지이기도 했다.

도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마을의 일부는 사라졌고, 남은 곳들도 주거지로서 기능을 점차 상실했다. 지금은 이곳을 ‘원(原) 괭이부리마을’, 혹은 ‘만석어촌마을’이라고 부른다. 새 이름을 붙여 포장은 했지만, 화물차들이 밤낮으로 지나고 공장들에 둘러싸인 마을에서 사실상 쾌적한 주거 생활을 누리는 건 어렵다.

만석 우회고가교가 철거되면 평면도로 6차로가 설치된다는데, 옛 마을을 복원할 수도,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지만 적어도 주거환경의 근본적인 개선은 함께 진행할 필요가 있다. 아니면, 차라리 도시민속마을과 같은 전면적인 전환을 꾀하는 게 좋을 수도 있다.

1980년대 말은 부두의 쇠퇴기이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에 정점을 찍은 연근해어업의 어획량은 이후 점차 감소 추세를 보였고, 번성하던 부두는 횟집만 남은 관광지로 변했다.

연안부두가 조성되기 이전까지 만석동을 포함한 주변 해안에는 꽤 많은 부두들이 있었다. 염부두니, 객선부두니, 생선부두니 하는 곳들이 지게꾼을 비롯한 노동자와 어민으로 북적였다.

현재 명맥을 유지하는 만석부두와 화수부두에서 옛 부두의 번성기를 재현해 낼 수 있다면, ‘시민의 바다’를 찾기 힘든 인천에 일대 전환점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욕심을 내본다면, 지금은 자취조차 찾기 힘든 과거의 포구를 찾아 복원을 시도해 보는 것도 잃어버린 바다를 찾는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석 우회고가교의 철거는 그 주변의 변화에 기대를 걸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걸 만들어 포장할 필요는 없다. 개발 시대에 사라진 부두 앞 러시아영사관 건물의 벽돌이 지금은 한 음식점의 벽체로 활용중이다. 사실 관계는 따져볼 문제이지만 건물이 헐리던 때 트럭에 싣고 와 새 벽체로 생명을 유지시켰다고 한다.

오래된 모든 것을 항상 그 자리에 보존시키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변화를 피할 수 없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만석 우회고가교는 이제 곧 사라진다. 그것이 어떤 변화를 갖고 올 것인지, 산업과 관광의 시각을 떠나 생활과 문화의 시야에서 다시 한 번 고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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