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선 7기 인천시가 인천과 한국 정치사의 큰 인물인 죽산 조봉암 선생의 뜻을 기리고 알리기 위해 청소년용 도서 죽산 조봉암을 출간했다. 하지만 지방선거로 시장이 바뀌자 인천시는 언론 취재와 보도를 저지했다. 매우 유감이다.

언론 취재와 보도를 저지한 이유도 황당하기 그지없다. 책 출간을 맡은 시 문화유산과는 "언론이 책 출간 사실을 보도 할 경우 시민들이 책을 많이 찾게 될 텐데 사업비를 소진 해 제공할 수 있는 책이 없다"며 보도를 반대했다.

심지어 "또한 책과 관련한 문의가 늘어서 부서 업무가 가중된다"는 황당한 논리로 언론 보도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집필을 맡은 송암미술관에 대한 취재마저도 제지했다. 군부독재 시절에나 취할 수 있는 언론에 재갈물리기를 21세기에 마주하고 있다.

죽산 조봉암은 1899년 강화군 선원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며 독립운동에 눈을 떴다. 이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을 다녀와 사회주의 계열 항일혁명가로 활동했다.

해방 후 제헌의회 국회의원과 농림부 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주도했다. 죽산이 주도한 토지개혁은 훗날 대한민국 산업화의 기반이 됐다. 당시 죽산은 강제로 땅을 뺏는 게 아니라, 지주에게 농지채권을 주는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지주가 이 채권으로 땅을 살 땐 시중 가격의 30%밖에 쳐주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적산을 매입할 땐 채권 가격 그대로 인정했다. 지주들은 정부로부터 적산을 매입했고, 이는 자본 축적의 토대가 됐다. 반면 농민에겐 무상에 가깝게 토지를 공급했다. 그렇게 토지개혁과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랬던 그가 간첩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건 이승만 정권 때문이다. 죽산은 1956년 진보당 당수로 대선에 나서 216만표를 얻는 등 이승만 정권을 긴장케 했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1958년 1월 죽산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2심과 대법원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재심 요청에도 불구하고 죽산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뒤 인천의 새얼문화재단과 죽산기념사업회 등이 죽산에게 씌워진 누명에 대한 재심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죽산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인천시는 그 뒤 ‘서거 52기 추모제’를 시작으로 죽산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지원했다.

민선 6기에 해당하는 유정복 인천시장 시절에도 정무부시장이 추모제에 참석했고, 현재 국민의힘에 속하는 당시 인천지역 보수진영 국회의원과 인천시당위원장 등도 헌화를 보냈다.

인천시는 지난 2019년 ‘죽산 조봉암 어록 1948-1954’를 시작으로 2020년 ‘죽산 조봉암 기록 1899-1950’을 출간했다. 그리고 올해 인천시는 마지막 권 ‘죽산 조봉암 기록 1950-2011’을 발간했다.

그 뒤 시는 청소년용 죽산을 출간했다. 청소년용 도서는 청소년을 위해 죽산 조봉암을 소개하는 교육용 역사인물 전기다. 1899년 조봉암의 출생부터 1957년 사망과 2011년 복권에 이르기까지 생애 전반을 다루고 있다.

시 문화유산과는 해당 서적을 지난 2월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 등록을 마쳤다. 정식 출간해서 국가기록원 등록까지 마친 도서에 대해 언론의 취재와 보도를 저지하는 인천시 문화유산과의 상식 밖 행위를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시 문화유산과는 “서적을 다룬 기사가 노출될 경우 다른 취재 처와 일반 시민들의 서적에 대한 문의가 많아진다” “더 이상 제공할 책이 없다” “담당부서의 업무량이 가중된다” 등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취재를 제한했다.

2021~2022년 죽산를 기리는 사진전을 개최하고 총 3권 발행을 진행한 문화유산과가 시장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번 '청소년이 만나는 죽산 조봉암’ 보도를 제지하는 데 다른 이유가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시 문화유산과는 언론 보도 제한에 사과하고, 해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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