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동희 극작가‧극단 십년후 기획실장
얼마 전에 지방에서 열린 전국규모의 행사에 참석했다. 중앙부처 장관과 도지사, 국회의원, 시장 등 위정자들을 비롯한 행사를 주최한 기관과 전국의 광역과 기초단위 관계자 1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행사였다.

큰 행사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개막식에 앞서 축하공연이 무대에 펼쳐졌다. 마지막 공연인 합창단이 마지막 곡을 한창 연주하는 중에 대공연장의 객석 뒤로부터 약간의 술렁거림이 전해져왔다. 이윽고 객석 사이의 나무로 된 계단을 따라 ‘또각’대며 내려오는 하이힐 소리가 점점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거물급(?) 10여명이 입장해 하이힐의 안내로 행사장 맨 앞의 정해진 자리를 차지한다.

객석을 가득 메운 참가자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들을 좇았고, 덕분에 합창단의 연주는 귀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연주에 열중하던 합창단원들의 시선도 어쩔 수 없이 흔들리고 말았다. 등을 돌린 지휘자는 변함이 없었지만 이미 합창단의 소리까지 흔들렸다고 느껴진 건 그들의 등장을 곱지 않게 여긴 글쓴이의 삐뚜름한 마음 탓이었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참으로 무례한 일이었다. 그들이 입장해 자리에 앉기까지는 겨우 1분이 될까 말까한 짧은 시간이었다. 좀 더 조심스럽게 등장할 수는 없었을까? 무대 위에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또 객석의 수많은 참가자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정말 몰랐을까? 그래서 하이힐의 도우미를 앞세워 당당하게 등장해 서로 자리를 양보하며 먼저 앉으라는 흐뭇한 광경을 연출할 수 있었던 걸까?

사실 공연에 대한 이런 ‘불편한 진실’이 비단 그 행사에서만 있었던 일도 아닐뿐더러 그다지 유별난 사건도 아니다. 참가자들의 면면을 알만한 굵직한 행사에서는 이와 비슷한 모습들을 흔하게 겪는다. 심지어 몇 해 전에는 뮤지컬 공연이 진행되는 도중에 다른 일정을 핑계로 단체장을 비롯해 내빈으로 소개받은 인사들이 우르르 몰려나가는 기막힌 광경을 본 적도 있다.

당당한 그들의 행동에는 공연자들에 대한 배려가 애당초 없는 듯 보인다.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해야 하고, 아무리 바쁜 일정이 있다 하더라도 볼썽사나운 꼴이다. 아주 작은 배려만으로 무대 위의 공연자들이나 객석의 관객들이 그들의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을 던지지 않을 텐데, 참 아쉽고 부끄럽다.

공연 시작 전에 자리를 정돈하고 공연이 끝난 다음에 자리에서 일어서는 건, 공연자는 물론이고 관객들에 대한 지극히 마땅한 도리다. 부득이 입장이나 퇴장을 따로 해야 하는 경우라면 공연 중이 아닌 별도의 시간을 마련해야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 미안함 정도는 갖는 게 당연하다. 자신들의 행사를 좀 더 고상하게 만들기 위해 공연을 청하지 않았던가. 예술인들의 알량스러운 자존심 정도는 존중해주고 지켜줘도 좋지 않겠는가?

지난 주말, 부평아트센터 구름마당에서는 ‘피크닉 콘서트’가 열렸다. 말 그대로 구름같이 모여든 관객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아트센터는 몇 달을 소중하게 관리해온 잔디광장을 시민들을 위해 과감히 개방한 덕에 공연시작 몇 시간 전부터 가족이나 연인들이 모여들었다. 급기야 공연이 시작될 즈음에는 잔디광장은 물론이고 삼삼오오 소풍온 시민들이 분수광장까지 자리를 차지했다.

이윽고 시작된 공연은 처음부터 관객을 사로잡았고, 잇따라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점잖기만 하던 클래식이 이렇게 편안하게 관객을 매료시킨다는 게 놀라웠다. 때론 진지하게 때론 경쾌하게 관객들의 마음을 뒤흔든 코리아팝스오케스트라의 연주, 그리고 여기에 더한 성악가들의 멋진 화음은 무더위를 물리치기에 충분했고 관객들에게 아름다운 여름밤을 선사했다.

공연은 이렇다. 무대 위의 예술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관객이 공연자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박수와 환호를 보내면서 무대와 객석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행사를 위해 생색을 내거나 구색을 맞추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닌, 예술가들과 관객 모두가 만족하는 교감과 소통이다. 모든 공연마다 무대를 바라보는 정성스러운 눈길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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