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인천투데이ㅣ1960년 4월 19일, 서울에서 시위를 벌이다 총상을 입은 장동원이란 인물이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숨졌다. 당시 거주지가 인천 도원동이라고 기록돼 있다.

장동원은 병원에 올 때부터 출혈이 꽤 심한 상태였다. 마침 그 모습을 목격한 한 이등병이 치료를 위해 자신의 피를 빼 주었는데, 그것이 이유가 돼 구속된 후 행방불명 됐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군인한테 수혈을 받은 장동원은 결국 회생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인천의 4.19혁명은 그 규모나 의의에 비해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던 서울의 시위를 포함해 인천사람들이 혁명 기간 동안 겪은 피해 사실이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다.

역사적 평가도 마찬가지다. 인천의 4.19혁명은 4월 19일부터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4월 26일까지 약 일주일간 계속됐다. 초등학생을 포함한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쳤다. 대학생과 시민들이 이에 호응하면서 인천 시내에 시위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뿐만이 아니다. 1960년 2.28대구민주화운동 이후 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인천 학생들도 3월 15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기습 시위를 감행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정부가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추진할 때 인천의 대학생들이 한일회담과 한일협정 비준 반대운동을 앞장서서 펼쳤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 1958년 진보당 사건, 1959년 조봉암 사형 집행 등, 일련의 부정과 불의에 누적된 국민의 분노가 결국 3.15부정선거를 앞두고 인천에서도 폭발했다. 그런데 이러한 시민혁명의 기억은 그동안 인천의 역사에서 소외된 채 남아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1960년 4.19혁명 이후 1961년 발생한 5.16군사쿠데타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군사쿠데타 직후인 1961년 6월 12일 건립된 인천기계공고 내 ‘4.19학생의거기념탑’에서 그 사정을 일부 엿볼 수 있다.

여기에 ‘학생 혁명’이나 ‘의거’라는 표현을 써서 학생들의 희생을 기리는 듯 했지만, 결국 ‘군부 혁명’의 역할을 강조하며 시민 혁명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증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에 존재하는 거의 유일한 4.19혁명기념탑이니 역사적 가치는 적지 않다고 할 것인데, 60여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시대의 평가를 담은 새 기념탑 건립도 추진해 볼 만하다.

4.19혁명 이듬해 도원동 운동장에서 ‘혁명 1주년 기념식’이 개최됐다.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 대규모 기념식이었다. 행사에 참석한 학생과 시민 수천명은 1년 전 자신들이 행진했던 길을 다시 걸으며 혁명의 완성을 기대했다. 이들이 이때 되짚어 걸어갔던 그 길이 바로 4.19혁명의 유적지다.

최근 인천 시내와 강화도 등에서 이와 관련한 기념비석이 설치되기도 했지만, 아직 사건의 의미를 알리는 데 수적으로 부족하다. 시위가 전개됐던 거리를 확인해 역사 복원을 시도하고, 혁명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다녔던 교정마다 상징물을 설치해 선배들의 희생을 되새기는 기회를 갖게 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무엇보다 4.19혁명은 6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건들에 비해 생존자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희생자나 6.25전쟁 관련자, 또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나 6.10민주항쟁 관련자에 대한 구술 기록 작업을 앞다퉈 진행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4.19혁명 관련자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게 정체상태에 있는 것은 의문이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시간이 늦었다고 후회할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이들을 찾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조속히 진행해야 할 것이다. 관련 기록물의 수집도 병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4.19혁명은 ‘미완’이란 단어가 자주 따라붙는다. 미완을 완성으로 바꾸는 건 지금 우리, 후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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