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A라는 사람이 있다. A는 다수의 사람과 같은 방식(속도, 편의의 수준)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권리가 있다. 단 A는 자신의 신체 조건으로, 다수의 사람과 같은 속도와 편의의 정도를 누리면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데 일정한 제한을 겪는다.

때문에 A가 ‘다수’의 사람들이 겪는 만큼의 수고로움으로 원하는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편의가 제공돼야 한다.

아니다. 여기서 ‘편의’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겠다. 그것은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고 여겨지는 ‘다수’가 그러하듯 자신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편의 시설(대중교통, 도보 등)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차원의 권리 보장을 위해 제공돼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다.

이는 A의 이동에 대한 편의의 증진을 위함이 아니라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기초적 권리의 수호와 관련돼 있으며 따라서 갖춰져야 할 사회적 책무를 수반한다.

그런데 A와 같은 이들에게 필요한 ‘의무적 구조물’는 A와 같은 조건을 가지지 않은 많은 사람에게 필수적인 장치는 아니다. 그들은 이 구조물을 이용하지 않아도 이동하는 데 제한이 없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주장할지도 모른다. A와 같은 소수의 사람이 대중교통을 탈 때마다 요구되는 어떤 시설(예를 들면 저상버스 리프트)의 작동 때문에 출발이 늦어진다면 다수의 이동에 제한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의 소요는 다수의 이동 불가능을 만들지 않으며 다만 출발을 늦출 뿐이다. 또한 애당초 이 구조의 실행은 탑승객과 같은 목적지로 가고자 하는 이의 승하차를 목적하고 있음을 재차 상기해보자.

만약 누군가의 탑승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장치에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거나 지나치게 위험한 요소가 따라 탑승객이 피해를 봤다면 그것은 그것을 이용해야 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정확히는 그 장치의 문제(그러니까 그 구조물을 수정해야 한다는)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말기로 하자.

어떤 구조물의 경우(이를테면 승강장의 엘리베이터) 반드시 필요로 하는 대상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이용하지 않아도 아무런 이동의 제한이 없는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다만 이때의 구조물은 편의의 증진이 아닌 그 구조물을 통하지 않으면 이동에 제약이 발생하는 경우에 대한 보완을 최우선으로 목적한다.

따라서 어떤 구조물을 사용한 결과의 평등을 고려할 때(비슷한 시간을 소요해 같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안전과 편의에 대한 동일한 수준의 보장), 이 구조물은 반드시 그것이 필요한 이에게 우선적으로 제공돼야 한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이야기다. 다들 알고 있을 만한 이야기라 이렇게 길게 이야기한 것이 좀 무색하게 느껴질 지경이고, 그렇기에 소수자를 위한 구조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다수의 권익을 해치지 않다는 방식으로 설득돼야 할 문제조차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권리의 평등이란 곧 기회의 평등인 동시에 결과의 평등일 수 있어야 하며, 같은 권리 수준을 지닌 공동체에 속한 그 어떤 다른 조건의 일원이라도 동일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음’이라는 상태가 다수의 권익이라는 주장 앞에서 훼손되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이미 다수가 ‘당연’의 범주 속에서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 또한 그런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그 어느 곳에라도 존재할 수 있는 권리는 다수에게 어떤 논리적 설득으로 통과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때로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민주주의란 다수의 목소리가 곧 승자의 것이므로 그 이외의 존재보다 더 앞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다수이기만 하다면 그것이 곧 정의가 된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데, 다수결을 따른다는 것은 다수가 선택한 의견을 따르되 공동체에 대해 그만큼 책임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것이든 아니든 내가 다수에 속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의 선택에 응당 몫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자 그 지향은 우세한 쪽이나 자기 자신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지속, 즉 공존을 향해야 한다.

그러므로 다수의 삶을 위협하고 있기에 소수의 권리를 억제해야 한다는 발언은 타당하지 않고 민주적이지도 않다.

이것은 최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시위를 둘러싸고 불거진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한 이야기다. 또한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현실에서 관찰되는 혐오의 양상, 즉 정상성에 부합하는 몸으로서의 다수를 앞세워 존재의 차등을 부여하는 혐오의 논리가 향하는 대상은 장애인이고 장애인만이 아니다.

혐오의 수행자는 누군가가 어린이, 노인, 여성, 퀴어 등 소수자이거나 사회적 약자라고 판단되기만 한다면 바로 그것을 근거 삼아 타인의 존재 가치에 대한 권리의 제한을 다수의 정의라 속여가면서 칼춤을 출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야만 자신의 권리가 보장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 타인을 훼손해야만 보장되는 권리란 침략에 가깝고 박탈과 다르지 않다.

이소영의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어렸을 때 가족들과 시외버스를 타고 어느 유원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 정류장 몇 군데를 거치며 버스에는 승객이 점점 많아져서, 좌석 가까이에 선 사람들은 손잡이가 아니라 유리창을 짚어야 하는 지경이 됐다.

우리 자리 옆에는 어떤 청년이 서 있었는데 그분도 역시 유리창에 손바닥을 댄 채 등에 힘을 주고 버티고 있었다. 그때 우리 쪽을 보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그분이 말했다. “애기가 짜부라질까 봐…….”

거기가 왼쪽 창가였던 것, 그분이 호리호리한 체격에 반팔 셔츠를 입었던 것까지 생각난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부모님도 이모나 삼촌도 선생님도 아닌 사람이 나를 지켜 주고 있구나. 나는 짜부라지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

장애인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이동권을 제한받아야 하는 사회라면, 어린이‧노인‧여성‧퀴어 등 사회적 약자 역시 그들이 그들 자신이기 때문에 권리가 축소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어린이는 단지 그가 어린이이기 때문에 짜부라지는 것을 ‘당연히’ 스스로 감수해야 하며, 그러게 왜 이런 시간에 어린 애가 만원 버스를 탔냐는 짜증 섞인 말과 함께 이동권 제한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장애인 이동권의 문제와 다르게 보이는가. 그리 달리 보이지 않는다. 나의 이동을 누군가가 방해하기 때문에(그것이 부당한 사적 이익을 대변하는 것도 아닌데), 즉 이런 불편은 타인이 나를 짜부라트리는 것이기 때문에 부당하고, 내가 짜부라지지 않기 위해서 남을 짜부라트려야 한다고 주장하려는가.

타인을 짜부라트리지 않으면서 버스를 타고 함께 가는 저 인용구의 장면을 상상해보라. 청년은 자신의 등에 힘을 주고 버틸지언정 자신도 아이도 짜부라트리지 않았다.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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