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섭 인천문화재단 평화교류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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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 약 20㎞를 흐르는 물길인 강화해협은 전근대~근대기 한반도의 가장 중요한 물길 중 하나였다. ‘염하’라 불리는 이곳은 넓은 곳이 약 2㎞, 좁은 곳은 1㎞가 채 되지 않는다. 손돌목으로 불리는 험난한 여울목이 있어 위험한 물길이었다.

그렇지만 지리적으로 한강하구와 가까워 경강(京江 : 서울 뚝섬에서 양화진 사이 한강 물길)으로 들어가는 지름길로 각광 받았다. 이런 까닭에 염하는 한국사 주요 사건의 배경이 됐다.

17세기 일어난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군대는 강화 함락을 위해 염하를 건넜으며, 19세기에는 프랑스, 미국, 일본 등 열강이 침입하는 경로로 활용되기도 했다. 또 근대기에는 인천-서울, 해주-연백-강화-인천을 잇던 기선들의 항로로 사용됐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염하라는 지명이 전근대기 그 어떤 기록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손돌목과 갑곶 등 염하 일대에서 발생한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조선시대 사료 어디에서도 염하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염하가 우리 고유의 지명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염하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병인양요 당시 강화를 침공한 프랑스군이 강화해협을 그린 해도에 ‘소금 끼 많은 강(Rivière Salée)’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시초라 전한다. 그리고 이렇게 그려진 해도를 일본이 입수한 후 프랑스어로 기재된 ‘Rivière Salée’를 염하(鹽河)로 직역하면서 굳어지게 됐다. 이에 대해 혹자는 염하가 최초로 땅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 창지개명(創地改名)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염하의 원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조선시대 사료에서는 염하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염하가 지나는 물길을 일컫는 명칭은 몇 가지가 확인된다. 대표적인 것이 갑곶강(甲串江)과 착량(窄梁)이다.

<강화부지(1783)>의 사실(事實)조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고종 대에 강화의 갑곶강에서 수전을 연습했다거나 몽골병이 갑곶강에 이르러 군사시위를 벌이자 장군 이광(李廣)이 수군을 거느리고 이를 막았다고 한다. 또 착량에 대해서는 “우왕 3년(1377)에 왜적이 착량에 이르러 군함 50여 척을 불태웠는데 이때 착량은 손돌목”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런 점은 염하가 한강의 경강, 서강, 양화강처럼 구간 별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강화부지>보다 약 90여 년 앞선 <강도지>에서는 염하의 원래 이름에 대한 단서가 확인된다. <강도지』> 선박(船舶)조에는 “무릇 북진(北津)에 경보가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므로 백마(白馬)가 중요하고, 동강(東江)에 적이 이른다면 안전한 곳이 없으니 조강(祖江)이 중요하다”라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백마는 현재의 개성특별시 개풍구역 백마산 일대를 말한다. 또 이 사료의 의미는 강화 북부 해안을 돌아 조강으로 들어오는 적의 방어를 위해서는 백마산이 첫 요지(要地)가 되고, 동강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조강일대 방어책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한편, <강도지> 형승(形勝)조에도 염하의 원래 이름과 관련한 기록이 나타난다. 여기서는 “이곳의 긴 물줄기는 멀리 한강과 임진강으로부터 나와 해암에서 합쳐지고 유도(留島)에서 갈라지는데 하나는 북문인 승천(昇天)으로 흐르고 한줄기는 험한 나루와 암초가 있는 동강으로 흐르며 여기에 5진 2보를 둔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한 물길이 유도에서 갈라져 하나는 북쪽의 승천으로 흐르고 다른 하나는 동강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이상의 두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물길의 위치이다. 선박조에서는 강화와 마주한 백마산-조강-동강으로 이어지는 물길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형승에 확인되는 기록에서는 유도에서 분기하는 물길이 북쪽 승천으로 나가는 물길과 동강으로 구분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위의 <강도지>에 나타난 지리적 정보에 근거해 볼 때 동강은 현재의 염하를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형승조에서 동강에 5진 2보를 둔다는 내용은 실제 염하 구간 내에 7개의 진보(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화도보,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가 설치된 사실(史實)과 일치하는데 이 또한 동강이 염하의 원 지명임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왜 염하는 동강으로 불렸을까. 아무래도 강화의 동쪽에 위치해 동강으로 불렸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찌됐건 염하는 우리의 선조가 불렀던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염하라는 이름은 19세기 열강의 시각과 입장이 철저하게 반영된 지명일 뿐이다.

지명은 그 지역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담고 있다. 지금이라도 강화해협의 이름을 염하가 아니라 ‘강화 동강’으로 부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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