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사람]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배뱅이굿 준보유자 박준영 선생

▲ 박준영 선생의 공연 모습.
“옛날 서울 장안에 이 정승ㆍ김 정승ㆍ최정승, 삼 정승 삼 부인이 재산은 많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중략) 매일같이 밤낮으로 아들딸 낳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고 정성을 들였더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삼부인 뱃속에 뭐 하나가 생겼는가봐. 열 달 만에 세 집에서 집집마다 하나씩 낳기는 낳았는데, 한 집은 여자를 낳고 한 집은 딸을 낳고 또 한집은 계집아이를 낳았어요.(관중 웃음)

이름을 짓는데 어떻게 짓는 고 하니, 이 정승 부인이 태몽을 꿀 적에 하늘이 쩍 갈라지더니 달 세 개가 떨어져서 세월이, 김 정승 부인도 갑자기 달 네개가 떨어져 안았다 해서 네월이, 최 정승 부인은 하얀 백발노인이 나타나더니 달비(=머리카락을 땋아서 머리 위로 둥글게 틀어 얹는 장식) 한 쌍을 주길래 치마폭에 받아가지고 배배 돌리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배뱅이라 지었다”(배뱅이굿 중 한 대목)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차려입은 이가 맛깔난 얘기를 쏟아놓는다. 관객들은 혼을 쏙 빼놓는 그의 연기에 한바탕 울고 웃는다. 무대에 선 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배뱅이굿 준보유자 박준영(56ㆍ청천동) 선생. 걸쭉한 목소리, 실감나는 표정에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까지 더해 좌중을 단번에 압도한다.

그의 명성은 국악인 사이에서 실력만큼이나 자자하다. 지난 20일 오후, 백마장삼거리에 있는 그의 국악원을 찾았다. 하얀색 생활한복을 입은 모습이 무대 위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직장생활 하던 중 우연히 소리꾼 만나

그의 고향은 강원도 삼척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를 따라 부르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큰 형이 아버지 선물로 엘피(LP)판 몇 장을 사왔다.

그 가운데 그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노래가 있었다. 바로 인간문화재 이은관(배뱅이굿 보유자) 선생의 배뱅이굿이었다.

“배뱅이굿을 듣는데 상여소리가 너무 좋은 거예요. 완전히 도취돼서 그 판이 마르고 닳도록 듣고 또 들었죠. 나중엔 앞뒷면을 다 외우게 되더라고요”

그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었다. 그후 학교를 마치고 군대에 갔다. 1980년, 제대 후 직장을 구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물건을 파는 회사였다. 교육을 받고 첫 발령을 받은 곳이 인천이었다. 그의 인천살이가 시작됐다.

“그때까지 소리를 하겠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소리를 하면) 먹고 살 길이 없었으니까요. 소리는 그냥 취미일 뿐이었죠”

하지만, 인생은 우연과 필연이 얽히는 것. 그는 같은 직장에서 우연히 소리하는 분을 만났다. 훗날, 인천무형문화재 제20호 휘모리 잡가 예능보유자가 된 김국진 선생이었다. 당시 김국진 선생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국악학원에서 강사도 하고 있었다.

박 선생은 학원에 따라가 귀동냥으로 소리를 익혔다. 1985년 김국진 선생은 아예 학원을 따로 차렸고, 이때부터 박 선생도 본격적으로 김국진 선생의 제자가 돼 소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생계를 위해 살려고 했는데도 나도 모르게 이 길로 오게 됐어요. 그때 그분(=김국진 선생)을 안 만났다면 아마 더 늦어졌겠죠. 어쨌든, 소리를 하긴 했을 거예요”

그러던 중 1989년, 이은관 선생이 제자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찻집에서 이선생을 만났다. 박 선생을 본 그의 첫 마디는 “외모는 됐네”였다고.

“라디오 시대가 아닌 매스컴 시대니까, 외모가 중요하다고 하시더군요. 목소리 테스트를 해서 통과를 했어요”

5년간의 전수생활이 시작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 종로3가에 있는 이 선생의 학원에서 두 시간씩 공부를 했다. 이 무렵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국악학원을 차렸다. 그리고 1996년 준문화재가 됐다.

연기보다 실제로 감정을 느끼는게 더 중요해

▲ 박준영 선생.
배뱅이굿은 황해도와 평안도 등 서도소리의 한 종류이다. 상사병으로 죽은 배뱅이의 넋을 달래주려고 굿을 해도 잘 되지않자, 평양 사는 난봉꾼이 지나가다가 엉터리 굿을 해주고 돈을 받아 간다는 내용. 이름은 배뱅이‘굿’이지만, 형식은 판소리와 같다.

박 선생은 이야기를 푸는 화자에서부터 배뱅이ㆍ무당ㆍ건달ㆍ상여소리꾼 등 혼자서 극 속의 역할을 모두 해내는데, 말투와 행동은 물론 실감나는 감정연기를 펼친다.

“목소리와 표정으로도 연기를 해야 하지만, 중요한 건 감정이죠. 진짜 그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 제대로 표현을 할 수가 없어요. 배뱅이가 죽고 상여가 나갈 때 실제로 눈물을 흘리면서 감정에 북받치는 소리를 합니다. 그래야 관객도 그걸 느끼죠. 실컷 울고 나면 눈물을 닦는 대목이 나와요. 그때 눈물을 닦고 감정을 추스르죠”

그는 “배뱅이굿은 내용 자체가 멋있고 재미있죠. 보편적인 감정과 정서를 담고 있는 데다, 굿 하는 대목도 있어 다채롭고요”라며 배뱅이굿의 매력을 풀어놓았다.

그는 배뱅이굿으로 2001년 전국 국악경연대회 명창부 우수상을 시작으로 2002년 전국 국악경연대회 종합금상, 2002년 경기국악제 전국대회 명창부 대상(대통령상), 그리고 2008년엔 한국방송(KBS) 국악대상 등 크고 작은 상들을 받았다.

그는 기억에 남는 공연으로 2002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배뱅이굿 공연을 떠올렸다. “1000석이 넘는 자리가 가득 찼어요.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지하철을 타려고 역으로 내려갔을 거 아니에요? 그때 종이로 된 전철표가 다 떨어져 승객들을 그냥 무임으로 태워 보냈다더군요. 당시까지 국악 공연에서 그렇게 많은 관객이 온 건 처음이었다는 얘길 듣고 참 기분이 좋았죠”

피아노로 국악 연주하면 동요가 돼버려

그는 예전에 비해 국악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국악을 배우려는 사람 중엔 젊은 층도 상당수라고. 하지만, 초ㆍ중ㆍ고 각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양악이 대부분이라며 국악이 대중화되기 위해선 아직도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국악은 우리 소리인데, 너무 등한시되고 있어요. 학교에는 국악을 전공한 선생이 적고, 음악 선생들은 민요를 피아노로 반주해요. 그렇게 하면 민요가 동요가 돼버려요. 국악의 참맛을 알 수가 없죠” 그는 청소년들이 국악을 좋아해야 앞으로 국악이 발전할 수 있다며, 학교마다 국악을 가르치는 선생이 늘어나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부평지역의 문화예술이 활성화되길 바란다고 했다. “내가 사는 이 고장에서 문화 예술이 좀 번창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내 바람인데,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이 자꾸 축소돼서 안타까워요. 앞으로 부평에서 제자 많이 배출하고, 공연도 많이 다니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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