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명절 연휴만큼 미뤄뒀던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보기 좋은 때가 없다. 올해 첫 명절인 설에도 이런저런 드라마와 영화를 뒤적였는데 각종 영상 매체가 여성과 관련한 콘텐츠를 기민하고도 발빠르게 제작하고 있음을 알고 새삼 놀라웠다.

글로벌 OTT에서 제작하거나 유통하는 콘텐츠 중 여성 서사가 상당한 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많은 소비자가 젠더 이슈에 대한 성찰을 기대하거나 요구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를 최소 2명 포함할 것 ▲서로 이야기를 나눌 것 ▲남성에 대한 것 이외에 다른 대화를 나눌 것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서사가 과거의 저작물 중 상당히 많았음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여성과 관련한 콘텐츠를 통칭 ‘여성 서사’라 할 때 그 양상은 매우 다양하다. 역사 속에서 조명되지 못한 여성 인물을 발굴해 재조명하는 경우가 있고(‘히든 피겨스’), 기존의 남성 캐릭터 중심의 서사를 여성 인물로 다시 쓰기 하는 경우(‘고스트 버스터즈’ 2016년, ‘오션스8’)도 있다.

이런 중에 최근 흥미롭게 주목하고 있는 것은 여성 서사에서 욕망을 지닌 존재로서의 여성을 조명하는 방식이다. ‘욕망하는 여성’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성욕을 지녔거나 출세욕을 지닌 존재로서의 여성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성애 중심 직계존속을 목표로 삼는 가부장제 질서 안에서 여성은 몸(육체성)으로 해석돼 이성적인 남성에 통제되고 관리돼야 하는 존재로 여겨지곤 했다. 이러한 사회화 과정에서 여성의 욕망은 부정되고 규제됐는데 ‘가정’이란 공간에서 금욕적이고 헌신적 삶을 사는 것을 ‘여성성’으로 규격화하는 맥락이 그 예라 하겠다.

이런 구조 속에서 욕망을 지닌 여성의 존재란 가부장제가 규범화해놓은 ‘여성성’의 제한 범위를 넘어선다. 이러한 여성은 팜므파탈, 악녀, 창녀 등으로 취급되며 가부장제가 승인하는 온순하고 순종적 여성상을 위반하는 ‘미친 여자’ 또는 부적절하거나 위험한 여성으로 규정됐다.

다시 말하면 여성의 욕망이란 ‘여성’을 규약하는 외부적 조건을 보여주고 그것을 넘어서려 한다는 점에서 가부장제의 탈규범성을 수행할 가능성을 지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욕망하는 여성을 ‘재현’의 문제에서 살피게 될 때 그 양태는 단순하지 않다. 단순히 위반하는 여성을 그린다고 해서, 성적 욕망이나 세속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여성의 주체성이 구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의 욕망은 때로 주체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듯하면서도 고스란히 가부장제의 욕망을 해소하는 자원으로 바쳐지거나 신자유주의적 욕망과 뒤섞여 자발적 몸의 관리를 성공의 지표로 강조하기도 한다.

이런 우려를 고려할 때 ‘와이 우먼 킬:시즌 2’는 욕망하는 여성의 형태를 (여러 의미에서) 미심쩍게 보여주는 드라마다. 1940~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서사는 비교적 전형적인 인물 도식을 활용한다.

수의사 남편과 살면서 자신의 세속적 욕망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다독여온 중산층 여성 알마, 그리고 그녀와 대적하는 아름다운 상류층 여성 리타의 대립 구도가 뚜렷하다.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의 대립이 이 서사의 치명적인 약점인 것은 아니지만, 이 서사의 큰 줄기가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가부장을 비롯한 타인을 파괴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있음을 고려한다면 두 여성의 대립은 각자의 세속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여적여’ 구도에서 탈피할 길이 없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의 주목해 볼 만한 점은 그동안 자신의 욕망을 통제당해온 여성이 주변을 통제하는 존재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 여성 신체의 다양성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후자에 부연해보기로 하자.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한 중산층에서 상류층 여성 모임의 한 가운데 우뚝 서고자 주변을 희생시키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캐릭터로 변신하는 알마는 몸집이 크며 수수한 외모를 가진 인물이다.

나이를 점치는 것이 무색하도록 아름다운 얼굴에 잘 가꿔진 몸매와 고급스러운 취향을 자랑하는 리타와는 대비되는 외형이다. 그런 알마가 서사의 말미에 이르러 자신의 세속적 아름다움을 스스로 경외하는 장면은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부여한다.

이 장면은 여성이 자기 몸을 긍정하는 차원으로 읽히지 않는다. 한평생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참고 자신을 자박하는 것에 길들여졌던 여성이 자신의 세속적 욕망과 인정욕을 광적인 수준으로 발산하면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은 기왕의 억압된 여성성을 부정하면서도, 그 욕망의 발현이 완전하게 순수한 자발성 혹은 주체성을 담보하는 것만은 아님을 암시하는 듯이 느껴진다.

이 드라마가 여성의 욕망을 아주 매끈하게 다뤄낸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욕망하는 여성을 해금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찝찝함’은 서사적 결함이기에 앞서 ‘욕망하는 여성’에 어떠한 환상성을 투영해온 바는 없었는가를 되묻게 만든다는 점에서 숙고할 만하다.

이제 여성 캐릭터의 재현 문제에 대해 여성의 등장 여부보다 좀더 까다로운 질문을 던져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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