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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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모 수녀회에 정기 후원을 하다가 지난해 연말 그만두었다. 아주 사소한 이유 때문이었다. 언급하기도 멋쩍은 단순한 해프닝이었지만, 수녀회의 복지사업을 다시 들여다보기에는 충분했다. 후원을 끊자 곧바로 도착한 수녀님의 진심 가득한 말에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을 되돌릴 생각은 없었다.

후원을 멈추면서 오래 생각하며 따져 봤던 건 하나였다. 수녀회를 처음 창설한 신부님과 조력자의 선한 의도가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변색되지 않은 채 지켜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현실적인 어려움에 맞출 필요도 있고, 더 많은 이들에게 혜택을 주고 싶은 안타까움도 있을 테지만, 그것들 모두 첫발을 내딛었던 순간의 간절함을 벗어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동안 시민사회단체가 꽤 빨리 성장하면서 많은 단체들이 생겼다. 그러한 단체들 속에서 애초의 발기문이나 정관의 목적에 맞춰 살아가는 이들은 드물다. 말과 글과 삶은 어지간한 걸인(傑人)이 아니고서는 서로 일치시키는 게 어렵다. 그만큼 현실은 녹록하지 않고 인간의 의지는 나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선한 의도를 이를 악물고 지켜야 하는 일이 있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사업이다. 한국은 전쟁을 겪은 탓에 고아나 저소득 가정의 아동들을 보호하는 복지사업이 이른 시기부터 번성했다.

규모는 크지 않아도 전쟁고아들을 보호하는 시설들이 국내 곳곳에 생겼고, 개인이 홀로 여러 아이들을 돌보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아이를 돌보는 일에 더 단단한 의지를 보여야 하는 이유는 작은 상처가 평생 사라지지 않는 흉터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실수도 돌이킬 수 없는 후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래서 아동복지사업은 섬세하고, 잠시라도 한눈팔면 안 될 사업이다.

수녀회에서 아동학대 문제 터지자 문 닫겠다는 무책임

새해가 되자 후원하던 수녀회에 아동학대 문제가 제기됐다. 보호시설을 졸업한 ‘동문’들 중 일부가 오랜 시간 ‘학대’와 ‘고문’에 시달렸다며 처벌과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수녀회는 곧 국내에서 진행했던 아동복지사업을 모두 종료하겠다고 입장을 발표했다.

사실이라면 일부 보육교사 등이 자행한 폭력이었겠지만, 책임은 수녀회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거의 60여년간 이어 온 사업을 한 순간에 그만두겠다며 대응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언제나 가난한 이’로 남아 ‘겸손한 봉사활동’을 한다는 설립 정신에도 어긋난다. 자칫 귀찮은 사업은 접고 인정받는 사업만 유지하겠다는 태도로 비칠 수도 있다.

이 수녀회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된 건, 선한 결과를 너무 많은 곳에서, 너무 빠르게 얻고자 했던 욕망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봉사의 대상도 다양해지고, 좋은 공간도 여러 곳 생기면서 규모를 점점 확장했을 것이다. 그것을 유지하려면 곳곳에서 지원을 받아야 하고 결실도 보여줘야 했을 것이다.

결국 그러한 조급함이 가난한 이로 남고자 했던 최초의 각오를 무심함으로 대체시켜버리고 말았으니, 마치 악화가 양화를 밀어내는 것처럼 손쉽게 얻으려 했던 선한 결과가 본래의 선한 의도마저 잠식한 격이 되고 말았다.

이곳 수녀회뿐만 아니라 여려 단체들이 이 같은 조급함을 겪는다. 그런데 아동의 문제에 있어서는 한 가지 더 들여다봐야 할 게 있다. 과거보다 사정이 나아졌다고 해도 보호시설이나 보육시설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은 끊이지 않는다. 그것을 일부 단체의 일탈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선감도에서 자행된 강제노동과 폭력, 살인 아직도 못 밝혀

아동복지사업이 양적으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통 받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건, 그 이면에 아직 해소되지 않은 ‘과거와 화해’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동학대의 역사와 관련해 가장 대표적인 곳이 선감학원이다.

일제강점기 운영을 시작한 선감학원은 배를 타고 건너가야 했던 경기도 안산 대부도 앞 선감도에 설치됐고, 1980년대 초까지 유지됐다. 이곳에서 자행된 강제노동과 폭력, 살인 등은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못했다. 부랑아 수용이란 명목으로 운영된 이러한 시설들은 갱생관 등의 이름으로 인천에도 여러 곳에 존재했다.

1938년 건립된 송림동 갱생관은 불량소년을 지도한다는 목적으로 아이들을 붙잡아 감금했고,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세어도 내 갱생관에서도 일본의 전쟁 물자 생산에 수용된 아동들을 이용했다.

광복 후에도 인천의 길거리에 있던 아이들은 트럭에 실려 선감학원 등지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성격은 다를지 몰라도 광성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인천소년직업학교, 혹은 인천소년수양원 역시 ‘부랑아’들을 수용하던 곳이다.

이러한 시설들에 수용됐던 아이들에 관한 정보는 전무하다. 가족들에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을 사회는 애써 외면했다. 그러니 그 실태가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사실상 이곳의 아이들은 사람들의 관심 밖에 놓이면서 세상으로부터 사라졌다.

이번 수녀회 사건에 ‘강제노동’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걸 보면서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꽤 큰 충격이었다. 해소되지 못한 과거가 곳곳에서 움터 솟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아동복지는 중요하고 시급하다. 그렇지만 성급하게 성장만 좇을 일은 아니다. 한국사회가 경험했던 과거의 과오부터 되짚어 그 속에서 가장 옳은 길을 찾는 게 우선이다.

전쟁 통에 배다리 골목길에 배고파 쓰러져 누워있는 두 아이를 본 양계석 원장은 차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집에 데리고 가서 훗날 계명원을 세운다. 발끝에 걸린 아이들을 처음 본 양계석 원장이 내뱉은 말은 ‘이 아이들을 어이할꼬’란 탄식이었다. 그의 일기장에 적힌 내용이다.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선한 의도를 만든다. 물론 그걸 지켜 가는 것이 어렵다. 그래도 지키려고 애쓸 가치가 있다. 결과는 결코 의도를 낳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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