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지난해 3월 유한락스는 코로나19 시대 감염병 예방과 관련한 락스 사용법을 다음과 같이 안내한 바 있다.

‘최소한 살균소독제는 최신 유행이나 프리미엄, 고급 제품도 무의미하며 비싸기 때문에 강력하지만 안전하고 편리하다는 개념은 신기루와 같습니다. 만약 비싸서 더 강력하지만 편리하고 안전한 살균소독 물질이 있다면 세계 보건 기구가 나서서 반드시 그러한 물질이나 기기의 가격을 낮춰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불결할 수밖에 없다면 공중 위생은 아무리 부유한 자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자의반 타의반 공중 위생을 책임져야 하는 유한락스는 어떤 상황에서도 가격이 저렴해야 합니다.‘(감염병을 효과적으로 예방하지만 안전한 살균소독법, 2020년 3월 2일)

위생이 경제력에 비례해 획득된다면 어떻게 될까? 소득 수준이 높은 자들은 더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불결한 상황에 처하게 되리라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답변은 이러한 예측에서 나아가 재산 소유에 비례한 청결의 획득이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 속에서 재산 수준과 무관하게 일정 수준 이상 청결하게 유지돼야 하는 ‘공중’의 위생은 언제나 일정 수준에 미달한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되며 공중위생 시설을 사용하는 한 어떤 부유한 자도 일정 수준 이상의 청결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 경우에라도 ‘공중 위생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 락스의 가격은 언제나 저렴해야 한다는 말을 다음과 같이 확장해서 해석해볼 여지는 없을까.

공중의 위생 수준을 포함해 공공 측면의 돌봄을 신자유주의적인 개념으로 봐서는 안 되며 여기에 사회의 모든 개개인이 일정 수준 이상의 책임을 지닐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말이다.

책 ‘돌봄선언’(더 케어 컬렉티브, 정소영 역, 니케북스, 2021년)에는 ‘모성 유대’의 신화에 기초하는 핵가족 형태를 중심으로 한 ‘돌봄’ 개념을 벗어나야 한다고 촉구하며 전방위적 돌봄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에 나온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이상적 시민은 ‘자율적이고 기업가적이며 실패를 모르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상적 시민처럼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가 생산하는 인간상의 환영(幻影)일 뿐이다.

이렇게 개인의 능력에 비례해 부를 획득한 자가 ‘자기 관리’도 더 잘할 수 있다는 요지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돌봄 외주화 확산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부를 획득한 자가 요리·보육·청소 등의 위생을 포괄하는 돌봄의 영역을 외주화할 ‘능력’을 얻을 수 있어 신자유주의적 인간상에 부합해야 한다는 일종의 신화(혹은 가르침)에는 논리적 결함이 있다.

이는 달리 접근하면 아무리 부를 많이 획득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돌봄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돌봄은 부의 성취와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며 그저 경제적 가치가 없는 ‘잡일’로 취급돼 저임금 서비스로 제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얹어 고려해야 할 것은 현대 사회에서 돌봄이 여성성과 밀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돌봄의 젠더화는 돌봄을 남성 중심의 전리품으로, 가부장 남성의 성역에서만 유효한 것으로 자리하게끔 만든 복잡한 맥락이 있다.

삶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돌봄은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부르주아적 형태의 가정-‘부의 축적에 공통의 이해가 달린 가족 구성원들의 감정적, 심리적 유대로 부르주아 계급의 사랑이 정의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부르주아적 가정이란 신자유주의체제 하의 일반적인 가정의 이데올로기와 그리 다르지 않다.(임옥희, 메트로폴리스의 신여성들, 여이연, 2020년, 280면)’-을 이룬 이들에게(자신의 가정 안에서만 인정된다는 의미의) 배타적으로 획득되는 노동으로 여겨진다.

이런 인식 속에서 이성애 중심에 근간을 둔 모성 신화로서의 돌봄 노동에 ‘값을 매길 수 없다’는 것은 여성성-모성성-돌봄의 신화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필수불가결한 노동인 돌봄을 무가치하거나 저가치한 것으로 만든다.

이는 이성애 중심의 남성 가부장 체제(부르주아적 가정과 거의 등가의 의미에서)와 무관하지 않으며, 돌봄 노동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젠더적 성찰이 불가피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역설과 다중 억압의 맥락 아래 돌봄 노동은 오랜 시간 착취돼 왔으며 공중 위생과 보건에 있는 힘껏 기댈 수밖에 없는 2년 여의 코로나 상황을 겪어오면서 더욱 심화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일차적으로는 K-방역의 성과가 의료계 노동자 착취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 공공 보건 차원에서의 마스크 수급 문제부터 백신 접종 등에 대한 더 각별한 돌봄의 형태가 필요한 노인 계층의 소외 현상, 여성의 가정 내 돌봄 노동의 부담이 가중돼 발생하는 문제 등이 그러하다.

이런 상황은 분명 일정 수준 이상의 위기의식을 고취시키지만 그저 위기를 느끼고 말 일은 아니다. 인간 존재가 전방위적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가치를 경제수준이나 성별에 근거해 차별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고 믿어온 과거를 청산해야하며 상호 호혜적으로 운용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돌봄선언’의 주장에 좀 더 기대보건대, 인간이 상호의존적인 존재이며 그런 방식의 호혜성이 필요한 존재임을 다시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돌봄은 개인의 성취에 따라 좌우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상호취약성과 상호연결성을 인지(30페이지)’함으로써 (이 책에선 차별 없는 돌봄이라는 의미에서의 ‘난잡한 돌봄’이라 표현) 지구적 차원에서 공공화해야 하는 문제에 가깝다.

코로나 시대는 어쩌면 서로에게 기대어 돌봄을 받아야 하는 인간 종(種)의 약자 됨을 자각하게 하는 시간이어야 했던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을 되새기면서 다음 해로 건너가는 마음을 다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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