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인천투데이|설악산·해인사·불국사·민속촌, 모두 수학여행의 인기 장소다. 이런 곳의 초입에 어김없이 걸려 있던 게 낙화(烙畵)다. 간혹 정자관까지 갖춰 쓴 할아버지가 관광객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림 그리는 데에만 몰두하며 앉아 있기도 했다.

가격도 생각만큼 비싸지 않았다. 소품 정도는 학생들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도 잠깐 고민을 하고 살 만한 수준이었다.

낙화는 흔히 얘기하는 인두 그림이다. 인두를 숯불에 달군 후 나무에 대고 지져서 만드는 그림이다. 나무가 가장 흔한 재료이지만 종이에도 그리고, 비단에도 그리고, 요즘은 가죽도 많이 쓴다.

태워서 그리는 건 다 낙화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 전부터 대나무에도 그려 왔는데 그건 특별히 낙죽이라고 한다. 낙죽장(烙竹匠)은 1969년에 이미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었지만, 낙화장(烙畵匠)은 2018년이 되어서야 지정을 받았다.

낙화는 전통 회화다. 조선시대에는 화화(火畵)라고도 했다. 19세기 실학자였던 이규경은 일종의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란 책에서 순조 때 인물인 남원사람 박창규를 고금 제일의 낙화 장인으로 치켜세웠다.

이규경이 이 책의 한 부분을 할애해 쓴 ‘낙화변증설(烙畫辨證說)’에는 중국의 최고 장인으로 무풍자(武風子)가 나오는데 박창규가 그와 자웅을 겨룰 만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서예가이자 1906년에 창간된 ‘만세보’의 사장이었던 오세창은 안동 사람 장씨((張氏)가 낙화에 뛰어났다고 소개했다. 장씨는 조선 선조 때 사람이다. 적어도 임진왜란 전후부터 우리나라에 낙화가 회화의 한 방식으로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오래된 유산이라면 조선시대 작품 하나 정도는 남아 있을 법도 한데, 그걸 찾아보는 게 쉽지 않다. 이유가 있다. 낙화의 가장 큰 약점이 변색이기 때문이다. 불에 그슬려 그림을 그리는 탓에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바래서 사라져버리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낙화를 그리는 데 또 하나 어려운 점은 재료로 쓰는 나무에 있다. 원목을 그대로 쓰면 좋겠지만 가격도 비싸고 약간 큰 작품을 제작할 때는 그만한 크기의 좋은 원목을 구하는 것도 어렵다. 관광지에서 쓰는 것은 대개 잡목이다. 그래야 단가를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화 작가들은 합판에 무늬목을 붙여서 쓰는 방식을 선택하기도 했다. 원목을 적당한 두께로 켜서 잘만 붙이면 작업에 무리도 없고 가격도 얼추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원목이 수입되는 인천은 작가들이 나무를 고르기에 좋은 장터이기도 했다.

낙화의 도구인 인두는 본래 한복의 동정을 다리던 것이라고 한다. 낙화만을 위해 따로 인두를 만들지 않았다. 최근에는 공방이 유행을 하면서 버닝펜이란 것이 많이 쓰이기도 하지만, 숯불에 달구던 인두가 1세대라면, 그 다음을 잇는 2세대는 투박한 납땜 인두였다. 납땜용이기 때문에 작가에 따라 끝부분의 촉을 갈거나 구부려서 맞춰 사용해 왔다.

그렇게 전승된 낙화는 수묵화나 유화에 뒤지지 않을 만큼 세밀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한 작품은 관광지 기념품 가게의 것들이 사실상 거의 전부일 것이다. 가격을 따져 봐야 하는 관광지에서 재료비와 시간을 들여 만든 작품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러니 낙화는 여전히 그 본모습을 널리 알리지 못했다.

낙화의 가치를 알아본 건 어찌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미군들이 먼저였다. 미군들은 사진에도 관심이 많고 초상화를 그리는 것도 좋아해서 기지 주변에는 사진관과 초상화 화가들이 항상 있었는데, 거기에 또 한곳 인기가 많았던 점포가 인두 그림 가게다.

미군의 수가 줄고 기지가 이전되고, 그런 것도 영향을 끼쳤는지, 낙화 작가들도 조금씩 사라졌다. 지금은 관광지에 가더라도 인두 그림을 만나는 건 어렵다.

작가들이 없어지는 건 생계와 관계된 문제이기도 하다. 과거에 비해 미술작품이 세간에 언급되는 비중이 높아졌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개는 투자 대상으로서 거론되는 경향이 크다. 한마디로, 갖고 있으면 돈이 된다는 것이다. 미술이 문화가 아니라 경제로 다루어지는 것인데, 모순되게도 그럴수록 많은 작가들은 직업을 포기한다.

그렇게 사라지는 작가들과 함께 예술가의 몸짓 또한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다. 숯불에 올려놓던 인두도, 받침대를 대고 나무 위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손동작도, 무늬목을 정성스레 붙이던 기술도, 언젠가 복원할 수 없는 과거가 될 것이다.

공공기관에서도 미술 작품을 구입하는 추세다. 미술이 생활 속에 자리를 잡으려면 작품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그 지난한 과정들도 보존하고 알려야 한다. 투자 가치는 없더라도 방 안에 마음에 드는 그림을 걸어 놓고, 나아가 사람들이 가볍게 그림을 직접 그리며 즐기는 사회가 화려한 미술관이 있는 사회보다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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