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희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홍인희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홍인희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인천투데이│얼마 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조선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이 쏟아져 나왔다. 금속활자뿐만 아니라 자동 물시계의 주전(籌箭:작은 구슬을 저장했다가 내보내는 시보 장치를 작동시키는 부품), 해와 별자리로 시간을 알 수 있는 천문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화포인 승자총통, 동종 등의 유물들도 함께 발견됐다.

특히나 한글 활자는 1448년(세종 30) 간행한 우리나라 표준음에 관한 운서인 동국정운(東國正韻)식 표기법에 따른 활자라 더 주목을 받았다. 또한 두 개 활자를 붙인 연주활자도 발견됐다. 한문 공부할 때 한글 현토를 다는데 많이 쓰이는 현토는 아예 두 개를 붙여서 제작한 것이다. 아마도 필자가 기억하기로 창제 당시 한글 활자가 발견된 것은 처음일 것이다.

발견된 한글 금속활자 600여 점과 함께 한자 금속활자도 1000여 점 발견됐다. 다양한 종류의 한자 금속활자 중에는 갑인자(1434년)로 보이는 활자도 발견됐다. 조선시대 만든 활자는 제작한 연도의 육십갑자 이름을 붙이는데 갑인자는 세종 때 만든 것으로 상당히 발전된 활자 인쇄술을 반증하는 것이다. 갑인자는 140여 년간 꽤 오래 사용됐기 때문에 인쇄본의 종류가 많은데 활자가 발견된 것은 또한 처음이다.

유물이 발견된 곳은 조선의 사법기관 의금부, 의료행정과 의학교육을 하던 전의감 등 중앙관청을 비롯해 왕실 궁가, 어용 상설시장인 시전행랑이 위치한 한양의 중심가이다. 소승자총통은 발견된 유물 중에서 가장 늦은 시기인 무자년에 제작된 것이라 볼 수 있어 아마도 1588년 이후에 누가 고의적으로 묻었다가 2021년에야 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급하게 땅 속에 숨기고 피난을 간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으나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금속활자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로 올라 갈 수 있다. 특히 고려 강화 천도 시기에 만든 금속 활자본은 당시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후집에 기록이 전해진다. 이규보의 발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 인종 때 최윤의(1102~1162) 등 17명의 신하가 고금의 예문을 모아 ‘상정예문’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책을 만든 지 여러 해가 지나 책장이 없어지고 글자가 빠진 부분도 있어 다시 2본을 만들어 한 본은 예관에 보관하고, 한 본은 최충헌의 집에 간수했다. 강화로 천도할 때 담당관리가 경황이 없어 미쳐 가져 오지 못해,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최이)의 집에 보관했던 책을 가지고 금속활자로 28본을 만들어 여러 기관에 나눠줬다는 것이다.

강화 천도 시기에 금속활자를 최초로 창안해 만든 것은 아니다. ‘상정예문’처럼 지금까지 전해지지는 않지만 그 이전에도 금속활자를 만들어 쓰고 있었을 것이다. 금속활자의 인쇄술은 활자의 주조기술 뿐만 아니라 판에 활자를 고정시키는 것, 그리고 금속으로 된 활자에 잘 묻는 먹을 개발하는 것 3가지를 두루 갖춰야 가능한 고도의 기술이다.

그러한 고도의 기술을 강화 천도시기에 발명해서 갑자기 만들어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이전부터 쓰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 강화천도 시기의 금속활자도 이번에 발견된 금속활자처럼 강화 어딘가에서 느닷없이 나타나지 않을까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서울 종로 일대는 조선 한양도성의 중심지로 ‘조선의 폼페이’라 불린다고 한다. 그야말로 파면 뭔가 나온다는 것이다. 한편, 강화도 읍내야 말로 한반도 남측에서 ‘고려의 폼페이’라고 불려야 할 곳이다. 강화도 읍내도 도로 공사 등으로 땅만 파면 무언가 나왔다.

이번 달 11월 3일부터 다음달 12월 31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인사동 출토유물 공개전’을 하고 있다. 한번쯤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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