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걷기여행 26 - 수도권의 한려수도, 덕적군도

▲ 비조봉에서 내려다 본 덕적도 일부분.
(사)인천사람과문화에서 1년에 두 번씩 진행하고 있는 ‘인천공부길’ 행사에 참가하느라 지난 4월 28일부터 29일까지 1박2일간 덕적도에 다녀왔다. 연안부두터미널에는 여전히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서해안의 섬으로 가는 대부분의 배편은 매진이다. 다행스런 일이다.

인천에 나왔다가 이번 우리 여행을 도와주기 위해 함께 들어가는 덕적도 주민 이덕선 선생을 배 위에서 만났다. 부두를 떠난 지 10여분이 지나니 인천대교는 마치 터키의 ‘보스포러스교’ 같고, 송도의 높은 빌딩들은 마치 사막 위에 떠있는 신기루 같다.

갈매기들은 어디까지 따라오려는지 배의 고물 위에서 저공비행을 하고, 가끔씩 세찬 바닷바람이 모자를 날린다. 배는 1시간 10분여만에 덕적도 진리 선착장에 도착했다. 작년 9월 굴업도를 방문하기 위해 잠시 들렀는데 반년 만에 다시 여행하게 되니 더욱 반갑다.

원래 서포리에 있는 이 선생 댁에서 민박을 하려고 했는데, 보일러가 고장이 나 이 선생 댁 바로 옆집으로 민박을 정했다. 짐을 풀고 바람도 쏘일 겸 걸어서 서포리해수욕장으로 갔다. 서포리해수욕장은 처음 와봤다.

고등학교 시절, 조금 논다 하는 친구들이 텐트와 버너와 통기타와 야전(=야외 전축)까지 챙겨가지고 서포리에 놀러갔다 왔다던 얘기를 마치 무용담처럼 해줄 때, 더구나 여학생까지 함께 있었다는 얘기를 해줄 때, 나처럼 교실 앞줄에 앉았던 친구들은 그 친구들이 친구가 아니라 마치 형처럼 느껴졌고, 다른 세상 얘기처럼 듣곤 했던 서포리 해수욕장. 바로 그 서포리해수욕장에 오십 중반이 다 돼서 처음 왔다.

서포리는 마치 동해안 같았다. 물도 제법 맑고 깨끗했고 바위에는 굴도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하나 떼어내 까먹어봤다. 짜다. 해수욕장 근처 솔숲을 걸었다. 솔숲 사이에 데크(deck)를 깔아 삼림욕 산책로를 만들었다.

제1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어울림상’을 받은 곳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솔방울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달려 있다. 뭔가 건강하지 않다는 증거다. 산책로에 나무 데크를 깔아놓은 것도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덕적팔경을 아시나요?

▲ 도우 선착장에서 해산물을 파는 주민들.
숙소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이 선생 댁에서 덕적도의 역사와 덕적팔경(八景)에 대해 강의를 들었다. 덕적도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했다가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할 때마다 소속이 바뀌었다. 삼국이 각축할 만큼 덕적도는 요충지라는 얘기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전부터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낸 출발항이 덕적도라고 하고, 660년 신라가 백제 정벌을 위해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대군을 거느리고 소야도에 들어왔다고 한다. 고려 현종 때에는 수원의 속군으로 삼았다가 뒤에 인주에 속했다.

그 후 다시 남양부에 소속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계속 남양부에 속했다가 성종 때 인천도호부에 이속됐다. 1914년에는 부천군에 편입돼 면사무소를 개설했고, 1973년 7월 1일 옹진군에 편입됐다가 그 후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로 통합됐다. 현재 7개 리, 13개 마을로 주민 1200여명이 살고 있다.

덕적팔경은 국수봉의 단풍, 용담으로 돌아오는 범선, 운주봉에서 바라보는 달, 황해의 낙조, 문갑도의 글 읽는 소리, 울도의 새우 잡이 배들이 밝혀 놓은 불, 선갑도의 선갑봉에 걸린 저녁 구름, 서포리 해변에 기러기 내려앉는 모습 등이다. 덕적도와 덕적군도 등을 사계절 모두 가봐야 볼 수 있는 풍경들이다. 봄에 일박으로 와서 볼 수 있는 풍경은 뭐가 있을까? 황해 낙조 정도가 있구나.

아! 섬들이 이렇게 모여 있구나

▲ 서포리해수욕장. 동해안처럼 모래와 바닷물이 맑다.
본격적으로 덕적도 여행을 시작했다. 맨 처음 비조봉 등산에 나섰다. 비조봉은 높이가 비록 292미터밖에 안 되지만 바다에서 바로 솟아 올라와서 그런지 제법 우뚝하고 오르기에도 만만치 않았다. 대나무터널을 지나 한 시간여를 숨 가쁘게 오르니 감투바위가 있고, 거기서 한숨 돌리고 기운을 차려 다시 오르니 서해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이 굴업도, 맞은편이 문갑도다. 아 섬들이 이렇게 모여 있구나. 덕적군도란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난다. 작년 굴업도 갈 때는 덕적도에서 문갑도 등을 거쳐서 맨 마지막으로 갔기 때문에 굴업도가 덕적도에서 매우 먼 줄 알았다. 이렇게 먼데 굴업도가 무슨 덕적군도인가 의문을 품었다. 역시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덕적군도는 소야도ㆍ문갑도ㆍ선갑도ㆍ굴업도ㆍ선미도ㆍ백아도ㆍ울도 등이다.

어쨌든 봉우리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풍경이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사실 그동안 덕적도가 이렇게 아름다운 섬인 줄 몰랐다. 안 가봤지만 나폴리에 비할까? 바다와 섬이 적당한 간격으로 점점이 떠 있고 햇빛을 머금은 서해바다는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인다.

비조봉 정상 누각에 오르니 산에 오르느라 흘렸던 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료 망원경으로 바다를 내려다보니 기분으로는 저 멀리 중국까지 보이는 것 같다. ‘덕적구경(九景)’에 넣어야 할 것 같다. 이름은 ‘비조망해’, 비조봉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꼭대기에서 후발대가 떠온 자연산 놀래미회를 안주로 소주 한 잔 하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비조봉은 서해에서는 드물게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다. 시간이 너무 일러 일몰은 아직 멀었다. 내려가는 코스는 망재 쪽으로 잡았다. 올라올 때보다 길이 훨씬 순하다.

▲ 능동자갈마당.
내려가는 길과 운주봉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운주봉에 오르면 또 어떤 아름다운 모습이 펼쳐질까? 궁금하기도 해서 내친 김에 운주봉까지 올라보고 싶었지만, 그래서 덕적팔경 중의 하나인 운주망월을 보고 싶었지만, 달이 뜨려면 아직 멀었으니 그건 헛된 욕심, 운주봉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일 년 중 신록이 가장 아름다운 4월, 갓 태어난 잎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마치 아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웃음이 절로 나온다. 만일 이 세상에 나무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모두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서포리성당 쪽으로 내려왔다. 한때는 신자가 수백명이었다는데 오늘은 몇 명뿐이다. 성당 마당은 풀만 웃자라 있다.

자장면이 맛있다는 중국음식점을 지나 황해 낙조를 감상하기 위해 서포리해변으로 왔으나 아뿔싸, 이번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다. 아쉽다. 결국 이번 여행에서는 덕적팔경 중 하나도 보지 못한 셈이 되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을 서포리해변에 묻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기 위해 고기를 굽고, 밥을 하고 떠온 회를 펼치니 밥상이 풍성하다. 회를 먹는데 굵은 낚싯바늘이 나왔다. 음, 한 마리씩 낚시로 건져 올린 자연산 놀래미가 확실하다. 이 선생 등과 덕적군도에 대해서, 서해 5도의 활성화 방안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백의 시도 한 수 읊었다. 덕적도의 밤은 깊어만 갔다.

하늘이 만일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이 하늘에 있지 않았으리라.
땅이 만일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땅에 주천이 없어야 하리라.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였으니,
술을 사랑함이 하늘에 부끄럽지 않아라.
- 이백의 ‘홀로 마시노라’ 중에서

심청전 공연‧해당화축제‧갯티길…서해안 섬지역의 콘텐츠를 생각하다

▲ 벗개방조제 인근의 간척지.
다음날 봉고를 타고 덕적도 투어에 나섰다. 먼저 벗개방조제로 갔다. 원래 바다였던 곳을 막아 논으로 만들었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경제성 면에서도 오히려 바다로 그냥 두는 게 좋았을 뻔했다.

이 간척사업을 주도한 이가 바로 최분도 신부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는 덕적도에서 30여년 살면서 간척사업뿐만 아니라 병원ㆍ전력ㆍ상수도ㆍ양식사업 등 많은 일을 했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그를 덕적도의 ‘슈바이처’로 부른다.

다음 코스는 북리. 북리로 가기 위해 국수봉을 넘어가는데 고개가 마치 속리산의 말티고개를 닮았다. 방파제 끝의 빨간색 북리 등대가 제법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북리 쑥개해변은 과거 번성하던 시절에는 극장도 두 개나 있었다. 물론 학교도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황해도에서 배를 타고 피란 온 사람들까지 포함해 1만 2000여명이 살던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능동자갈마당으로 갔다. 병풍처럼 두른 절벽 사이로 모래 대신 아기 주먹만 한 자갈들이 수도 없이 깔려 있다. 자갈들 위로 쳐들어왔다가 차르르 소리를 내면서 몰래 물러가는 바다 물결 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힌다. 바로 앞에 보이는 섬이 선미도다. 주먹만 한 자갈을 뚫고 해당화도 살고 있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이미자의 노래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이 바로 여기 아닌가. ‘능동’이란 지명에도 분명 뭔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덕적도의 콘텐츠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얘기가 나온 김에 서해안 콘텐츠에 대해 좀 더 논의를 진척시켜보자. 심청이 빠져죽은 인당수는 어디일까? 서해바다 어디쯤일 것이다. 대충 어느 지점을 인당수로 정하고 그곳까지 가는 동안 배안에서 심청전 공연을 보여준다. 또는 해당화 필 때를 맞춰 해당화축제를 한다.

서해안 섬에는 갯티길이라는 게 있다. 문갑도가 고향인 후배 시인 이세기 등에 따르면 갯티는 갯바위와 갯벌 사이의 공간으로 모래갯벌이다. 갯티는 삶을 이끌어가는 신성한 장소이며, 노동의 공간이며, 놀이터이며 문화공간이기도 하다. 갯티에서 바다 쪽으로 더 나가면 뭍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갯벌이다. 이 갯벌과 달리 갯티에서는 주로 굴ㆍ고둥ㆍ돌김ㆍ돌미역ㆍ파래ㆍ낙지ㆍ박하지ㆍ바지락 등을 캔다.

▲ 밧지름해변.
그러니 섬사람들에게 갯티는 밭이다. 살을 에는 추운 날 아침, 섬의 어머니들은 굴 바구니를 들고 갯티로 나간다. 거기서 농부가 밭에서 농작물을 캐듯 생계를 캔다. 이 길들을 찾아내고 가꾸고 다듬어 갯티길이라 이름 짓고 여행자들을 불러모아야한다. 무색무취한 ‘둘레길’이라는 길 이름은 이제 너무 식상하다.

우리 인천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찾아내 쓰지를 못한다. 서해안 섬에 널린 수많은 설화와 전설과 민담을 찾아내서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서해안의 모래를 팔아먹는 건 정말 아니다. 후손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러면 안 된다. 군 살림이 얼마나 어려우면 해사까지 채취해서 팔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전혀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해양생태계를 파괴하고 결국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섬으로 바뀌고 말게 될 것이다.

물론 선결해야할 문제가 있다. 뱃삯을 낮추는 것. 현재 인천시민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운임 50% 감면 혜택을 전 국민들에게도 줘야 한다. 사실 혜택도 아니다. 대중교통 요금을 생각하면 된다. 전철ㆍ시내버스 등을 탈 때 우리가 비용을 전부 내고 타지 않는 것처럼 뱃삯도 똑같은 정책이 적용돼야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많이 오게 하면 서해 평화는 저절로 따라온다. 섬의 요새화는 전혀 대안이 아니다. 이야기가 너무 나갔나?

1박2일 동안 다 본다는 건 욕심일 뿐

진2리의 이개해변으로 갔다. 이개해변은 바지락 캐기 체험장으로 만들어놓았다. 진2리부녀회에서 호미도 빌려준다. 바로 앞에 보이는 섬은 목섬. 시간이 있었다면 바지락도 캐보고 이런저런 체험을 했을 텐데. 하기야 섬의 넓이만 해도 여의도의 여섯 배인 덕적도를, 곳곳에 비경이 숨어 있는 덕적도를 일박이일 동안 다 본다는 것은 욕심일 뿐이다. 당연히 덕적도 최고봉인 국수봉(314미터)은 엄두도 못 냈다.

시내(?)로 나왔다. 덕적도의 다운타운은 진1리다. 이곳에 면사무소ㆍ파출소ㆍ보건지소ㆍ농협ㆍ학교가 모두 모여 있다. 덕적초ㆍ중ㆍ고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 한 곳에서 수업을 받는다.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왔으니 비록 주마간산 격이기는 하지만 덕적도를 한 바퀴 돌았다. 숙소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짐을 꾸려 덕적도 마지막 코스, 밧지름해변으로 갔다. 서포리해변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해변풍경이다.

비조봉이 내려다보고 있는 밧지름해변은 모래도 좋지만 해변에 늘어선 수백 년도 넘은 적송들이 잘 어우러져 있다. 드문드문 캠핑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솔 숲 아래에서 낮잠 한 숨 늘어지게 자면 좋을 텐데 그것 또한 괜한 욕심, 이제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천으로 나오는 배를 타기 위해 도우 선착장으로 나왔다. 인천에서 한 시간만 오면 이토록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있는데, 그동안 우리는 덕적도를 너무 홀대하고 살았다.
▲ 글ㆍ사진 신현수(시인ㆍ부광고 교사ㆍ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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