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인천투데이│누에는 몸을 감싸는 아름다운 실 때문에 제 목숨을 다 쓰지 못하고 죽는다. 열심히 뽕잎을 먹고 실을 토해 고치를 만든 뒤 훨훨 하늘을 날 생각만 하며 깊은 잠에 빠지면, 사람이 그걸 가져다 물에 삶아서 번데기를 얻는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누에로 생계를 유지해 왔다.

하얗고 둥근 누에고치는 생각보다 단단하다. 그렇게 튼튼한 껍질을 깨고 나와 나방이 되는 것인데, 사람한테 유충인 누에나 변태 끝에 등장하는 누에나방은 쓸모가 없다. 고치에서 뽑아낸 실을 얼레에 살살 감아 명주실을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 비단옷을 짓는다. 번데기는 그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일 뿐이다.

번데기가 영양 많은 국민 간식으로 자리를 잡은 건 아주 옛날 얘기가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약으로나 썼을까, 지금처럼 청양고추를 넣어 팔팔 끓여 먹거나 길거리 음식으로 삶아서 팔던 먹거리는 아니었다.

실만 얻을 목적이라면 고치의 한 구석에 구멍을 뚫어 번데기를 끄집어낸 후 작업을 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고치에 칼질을 하면 좋은 상품을 만들지 못한다. 누에의 목숨을 포기하는 대신 최상급 명주실을 갖게 되는 것이다.

수확한 누에고치는 단단함을 풀기 위해 끓는 물에 통째로 던져 넣는다. 번데기는 그 안에서 산 채로 서서히 익는다. 손바닥만한 번데기 통조림 안에는 얌전히 잠을 자다가 변을 당한 놈, 온몸으로 몸부림치다가 생을 마감한 놈, 막 날개와 다리가 돋아 기지개를 켜다가 죽은 놈, 생의 끝자락을 장식한 온갖 군상이 화석처럼 남아 있다.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쳐서 고치를 생산하고, 거기에서 생사를 만드는 양잠업과 제사업은 조선시대에 국왕이 권장하던 중요한 산업이었다. 그것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근대 산업으로 변화됐다. 국내 곳곳에 제사(製絲)공장이 건설됐고, 대부분 여성인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을 했다.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한 제사공장은 항일혁명운동의 기지이기도 했다.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면서 희생되는 누에의 수도 급격히 증가했다. 공장 건설에 힘을 쏟아붓던 일본 당국자들도 신경은 쓰였던 모양이다. 1926년 동대문밖 용두리에 ‘잠령공양탑’이란 걸 세워 ‘인간 생활의 희생자가 된 누에의 영혼’을 달래 주었다. 탑에 각인된 글씨는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가 직접 쓴 것이다.

공양탑의 제막식이 있던 날, 경기도지사를 포함한 지역유지들이 모여 공양제도 지냈다. 준비해 온 글을 낭독하며 추모도 하고 법회도 진행했다. 이때 세운 잠령공양탑은 이후 부천군 소사면으로 옮겼다가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은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처음 탑이 조성된 용두리 일대는 조선시대에 선농단이 있던 곳이다. 농사의 신에게 예를 올리는 국가제사가 시행된 제단이고, 근처에는 왕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모범을 보인 적전도 있었다. 서울 성북구 쪽에는 선잠단도 운영됐다. 양잠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으로, 왕비가 주관하던 장소다. 선농단과 선잠단은 서로 짝을 이루며 백성들에게 농업을 권장하는 의례처로 활용됐다.

선농단은 현재 공원으로 조성돼 있는데, 그 일대 공간의 변화가 흥미롭다. 일본은 1937년, 여기에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세웠다. 여성 교원을 양성하는 학교였다. 이곳이 후에 경성사범학교와 통합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바뀐다.

인근에는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도 유치했다. 종연방적은 영등포와 광주에도 공장을 갖고 있었다. 어린 여성들이 강제동원을 당한 주요 회사 중 하나이다. 이 일대는 여성 노동의 대표격인 잠업의 추모공간에서 여성 교육자 양성기관으로 변화됐고, 한편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식민지 여성 노동자들의 혁명적 노동운동의 현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에 새 총리가 취임했지만 한일 과거사 문제는 여전히 평행선을 달린다. 혹여 형식적인 행사였다고 하더라도, 일본에 출범한 새 내각은 누에의 희생에 사죄하던 그 마음으로 식민지 조선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이 번데기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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