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시녀이야기’는 젠더 디스토피아 세계를 배경으로 삼는다. 이 소설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사령관’ 중심의 남성 지배 사회인 길리어드의 복종자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이 사회 남성과 여성의 역할과 위계는 철저하게 분리돼 있다. 남성은 금융·경제·정치 등 사회 제반의 통제권을 쥐고 있으며 ‘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군대식 가부장 체제를 수호하고자 한다.

반면 여성의 지위는 최하위다. 그들은 사령관 체제의 존속을 위해 복종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처단된다. 그런데 이때의 복종은 사상적·신체적인 것 모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섹스 이분법의 구분을 따르는 체제에서 진정한 복종이란 기꺼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이다.

사령관의 아이를 ‘명예롭게’ 낳을 용의가 있고 또 그럴 수 있는 여성인 ‘아내’, 아내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경우 대리 출산을 위해 투입되는 ‘시녀’가 여성이 길리어드에서 부여받는 이름의 일부다.

한편,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거나 신체적으로 출산이 불가능한 여성들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러한 사례는 임신·출산하지 않는 여성은 생존이 불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주입하는 교육의 내용으로 다뤄진다.

임신과 출산을 하지 않는(하지 못하는) 여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소녀들을 교육하는 기관의 ‘아주머니’가 되는 것이다. 아주머니 중 몇몇은 (독자가 살고 있는 현실과 흡사한 사회에서) 길리어드로의 전환기를 거치며 길리어드 체제로의 변환을 ‘수용’해야 했던 이력이 있다.

가령,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전문직 여성이기도 했던 한 여성은 길리어드로의 체제 전복 이후 ‘아주머니’가 되어 길리어드 가부장제에 신체적·사상적으로 복종하는 여성을 양산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오롯이 ‘그녀들’의 잘못이기만 할까.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닐지라도 그런 방식으로나마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조건 속에서 무슨 선택지가 있었을 리 없다.

요컨대 소설은 가부장제가 여성 존재를 임신·출산을 위해 기능하는 신체로 국한시키는 양상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이러한 젠더 억압에 물리적인 강압뿐만 아니라 여성(‘아주머니’)을 끄나풀로 내세운 사상 교육, 교육 기회의 제한과 여성의 사회 진출 제한, 사유 재산 소유 불허와 같은 사회적 제재가 연쇄적으로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소설의 디테일은 그저 뛰어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삶을 직접적으로 환기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여성은 임신·출산하는 신체로 호명되는 바가 적지 않다. 성폭행으로 인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가명 ‘로’)이 임신 중단을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기소해 사실상 텍사스에서 ‘임신 중단’ 판결을 이끌어 낸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해 최근 그것의 번복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예다.

임신 중단 반대의 입장에서 여성은 물리적 강제력에 의해 권리를 침해당한 경우 그것에 대해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여성의 임신·출산 문제에서 누구에 의해 왜, 어떻게 수행되었는가가 아니라 다만 출산할 수 있는가만이 관건이 된다.

이러한 여성 신체에 대한 통제는 그 제한의 범위를 확장하기 마련인데 최근 탈레반의 사례가 그렇다. ‘시녀 이야기’에서 여성의 신체를 구속하는 것이 일정한 장소에 여성을 ‘배치’함으로써 인간을 사물화하는 일로 이어졌음을 떠올리면 탈레반의 아프간 점령 이후 여성 인권이 빠른 속도로 후퇴하고 있는 현실 역시 우려스럽다.

탈레반은 집권 이후 광고판의 여성의 모습을 모두 지우는 일부터 시작해서 아프간 여성의 복장 규제, 사회적 활동과 교육 기회를 제한하고 있다. 여성을 ‘보이지 않는 존재’이자 허가받아야만 보여질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이러한 현실의 모습은 소설 속 길리어드와 얼마나 다른가.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길리어드는 저 먼 허구의 세계에 자리잡은 것이거나 외국의 극단적인 사례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뉴스를 검색하면 여성 노인 폭행·추행·혐오와 관련한 최신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누군가의 일상툰(일상을 다룬 웹툰)에는 그저 길을 걷거나 물건을 사다가도 누군가 ‘농담’ 삼아 던진 말에 아연실색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돌아오는 여성의 이야기가 연재된다. 그러한 것을 보는 나 역시 한밤중에 여성이 거주하는 이웃집 문을 발로 차며 시끄럽다고 욕지거리를 내뱉는 남성의 목소리에 공포를 느꼈던 적 있다.

소설 속 길리어드나 탈레반에 비하면 이것은 과연 나은 현실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혐오는 스며드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있다고 믿어지는 것뿐이다. 작은 혐오를 허용한다는 것은 어떻게 둘러대도 결국 ‘혐오’를 승인하고 있다는 뜻이다.

소설의 결말에 이르면 먼 미래 시점에서 길리어드는 멸망한 체제로서 언급된다. 불행히도 아직은 소설 속 길리어드와 흡사해 보이는 현실이 어제보다 오늘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러니 내일은 그곳과 더 멀어지기 위해 현실의 감각에 더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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