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주 인천여성회 정책국장
5월 5일은 어린이날이었다. 그리고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이 개관한 날이기도 했다. 챙겨줘야 할 특정 어린이가 없는 나는 박물관이 세워진 서울의 성미산마을에 갔다.

박물관, 하면 으레 떠오르는 웅장함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소박한 건물이었다. 하지만 한 장 한 장 쌓아올린 벽돌마다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20년 넘는 눈물의 투쟁’과 ‘전쟁과 그로 인한 여성폭력이 없는 내일에 대한 바람’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개관식이 진행되던 1시간 남짓, 비좁은 박물관 마당은 그간의 투쟁과 관심에 대한 감사와 이 박물관을 통해 퍼져나갈 평화와 인권의 가치로 충만했다.

개관식 끄트머리 순서로 박물관 홍보대사를 위촉했다. 배우 권해효씨와 방송인 류시현씨, 그리고 농구선수 전주원씨였다. ‘소셜테이너(=사회참여 활동을 하는 연예인)’란 신조어가 나오기 훨씬 오래 전부터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해온 이들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행사 사회를 도맡았던 권해효, 류시현씨는 이날 개관식 역시 사회를 맡았다. 전주원씨는 코트를 주름잡던 선수시절부터 지금의 코치시절까지 자신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직접 박물관 건립 기금 모금함을 들고 관중석을 돌며 홍보와 모금활동을 했다.

세 사람 모두 1000회 차를 훌쩍 넘겨 버린 수요집회의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종종 나타나곤 했다. 유명인이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이들이 해온 실천과 그 마음이 홍보대사라는 직함과 더 없이 잘 어울렸다. 유명인이란 타이틀은 보너스일 뿐.

개관식이 끝난 뒤 전철역까지 꽤 먼 거리를 걸어가는데 바로 앞에 전주원씨가 보였다. 그녀의 옆에는 여남은 살 돼 보이는 딸아이와 남편이 함께 걷고 있었다.

지금이야 코치로서 뒤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입장이지만 선수시절엔 비인기종목이라는 여자농구임에도 빼어난 실력과 말간 얼굴로 경기마다 팬들을 몰고 다녔던 전주원씨. 그런 그녀가 차도 가져오지 않고 나와 같은 뚜벅이로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게 퍽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것도 다른 가족들은 죄다 놀이동산이니 패밀리레스토랑이니, 놀러갔을 어린이날에 딸과 함께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하다니. 전주원씨 가족 세 사람이 도란도란 걸어가는 뒷모습이 5월의 햇살보다 눈부셨다.

내 친구들도 대부분 어린이날을 챙겨줘야 할 자식을 둔 부모인지라 5월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어린이날에 뭘 해야 하나’가 주된 대화의 주제였다.

그 친구들 대부분은 테마파크에 가서 놀이기구를 타다가 꽤나 값비싼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써서 근사한 선물을 사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예상은 대략 적중했다. 어린이날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온통 그렇고 그런(!) 사진들로 도배가 되었다. 전주원씨 가족 세 사람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사진으로라도 남겨둘 걸! 그렇고 그런 어린이날 세레모니들 사이에 단연 돋보이는 사진을 올릴 수 있었는데!

아쉬웠다. 물론 나의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돋보이는 사진을 올리지 못한 게 아쉬운 건 아니었다. 인기 있는 운동선수가 보통사람도 하기 힘들고 쑥스러운, 모금함 들고 팬들을 만났던 소박하지만 이보다 아름다울 수 없는 용기를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지 못한 게 아쉬웠다. 놀이동산이나 패밀리레스토랑 말고도 ‘다른’ 어린이날 선물이 있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음이 아쉬웠다.

전주원씨가 딸에게 주고 싶었던 어린이날 선물은 아마도 전쟁이 없는 내일, 전쟁이 일어나면 당연한 듯 따라붙는 여성폭력이 없는 내일, 전쟁과 폭력으로 평생 억울함을 안고 사는 사람이 없는 내일, 국가가 나서서 국민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아픈 과거를 치유하는 내일이었을 것이다.

아이가 살아야할 미래를 부모가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그 바람을 위해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부모와 같은 실천을 하는 더 많은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만큼 아름다운 어린이날 선물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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