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여러 우려 속에서 2020 도쿄 올림픽이 개막했다. 코로나 시대에 열린 올림픽인 만큼 ‘자기 자신을 지키며 경기에 임한다’는 의미가 각별하게 다가온다. 특히 현재까지의 도쿄 올림픽 진행 상황 중 몇몇 사례는 폭넓은 의미의 ‘자기 지키기’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먼저 미국의 체조 선수 시몬 바일스를 떠올릴 수 있겠다. 바일스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기대감에 큰 부담을 느꼈고 경기를 치르면서 이 중압감을 견뎌 성과를 내는 것 못지않게 자신의 정신 건강을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판단해 기권을 선언했다.

올림픽과 같은 범세계적 선수권 대회에서 사람들은 종종 국가대표의 성적과 국가 프라이드를 동일시하곤 한다. 선수가 국가를 대표해 출전한 것은 사실이나 선수 개인의 완전한 훼손과 희생을 담보 삼는 성과란 왜곡된 성공 신화와 성과주의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돼야 한다.

성적을 절대 우위에 놓음으로써 선수 개인의 인간적 고유성을 박탈하는 식의 사고방식은 올림픽에서 유독 두드러진다. 금메달이 아니라서, 순위권에 들지 못해서 선수를 비난하는 발언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펜데믹 시대를 겪어나가며 우리는 인간성을 지우고 효율을 위해서 달려나가는 것이나 성과주의에 많은 인간적인 것을 바쳐야 하는 우리 시대 삶의 요구들을 조금은 새삼스럽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개인성을 망가뜨려가면서까지 전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곧 선(善)이 아니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발전할 수 있어야 건강한 공동체라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아프면 쉬고 지치면 무리하지 않고 충분히 회복할 것에 대한 감각을 조심스럽게 구축해나가는 시대에 바일스의 선택은 눈여겨볼 만하다.

여성 선수들의 복장 두고 신체 성적 대상화 적극 저항 목소리

한편, 여성 선수들의 복장 규정을 두고 여성 신체 성적 대상화에 적극적으로 저항의 목소리를 내는 사례도 있었다. 여성이자 선수인 이들의 ‘자기 지키기’인 셈이다. 이번 도쿄 올림픽 체조 종목에 출전한 독일 여자 대표팀은 몸통과 발목을 감싸는 유니타드를 입고 출전했다.

불필요한 신체 노출을 요구하는 규정과 이러한 노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의 성차별적 인식에 저항하기 위함이다. 사실 여성 선수의 복장 규정과 관련한 이의 제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무릎 위 길이의 반바지 차림을 허용하는 남성 선수복에 비해 여성 선수는 반드시 비키니를 착용해야 한다는 유럽핸드볼연맹의 규정에 대한 비판이 있었던 한편, 너무 짧은 바지를 입었기 때문에 제지를 받은 적이 있다는 패럴림픽 출전 선수 올리비아 브린의 사례도 있다.

이러한 현상을 돌아볼 때 문제는 여성 선수 복장의 ‘노출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 신체’를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소비하고 있는가에 있다. ‘누구의’ 복식이냐가 늘 화두에 오른다는 것으로부터 그 기저에 과연 무엇이 자리하는지 봐야 한다.

누가 누구에게, 어떤 사회적 규범을 내세워 그의 존재 양태를 규정하고자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젠더 위계에 대한 언급은 피할 수 없다. 남성중심적 사고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적 통념 안에서 여성이라는 젠더는 곧잘 신체성으로 환원되곤 한다.

여성 젠더의 존재 양태를 ‘특정한 시선에서 요구되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몸’에 가둬 사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의 몸)은 ‘통제’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는 일종의 착시에 기반하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여성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일종의 권리로서 행사할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안산 선수 헤어어스타일 간섭과 맨스플레인

양궁 국가대표 안산 선수의 헤어스타일에 대한 간섭과 그것을 근거 삼아 선수 활동에 제약을 가하기를 주장하는 최근 사례를 보자. 이 사안에서 ‘무슨 머리를 했느냐’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선수 활동의 제약의 근거 중 하나로 ‘숏컷’을 들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다.

문제적인 것은 그 반감이 개인의 고유성을 제약하자는 주장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여성 선수의 ‘숏컷’ 나아가 선수로서의 활동 범위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은 과연 누구의 어떤 입장을 대변하는가.

페미니즘의 지향을 오독한 채로 ‘페미니스트에 대한 사회적 매장’이라는 억압적인 목적 위에서 벌어지는 맨스플레인(주로 남자가 여자에게 자신이 더 해박하다는 생각으로 지식을 설명하는 것)은 폭력적 수사라는 혐의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기 어렵다.

선수의 역량 혹은 윤리성에 결함이나 혐의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그의 삶을 사회적으로 송두리째 탈락시킬 수 있을 만큼의 (종종 권리와 착각하는)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 또 그러한 권력의 행사야말로 자기 존재를 보증하는 방법이라 믿는 행위 한 가운데에는 공허한 자의식이 있을 뿐이다.

나아가 이와 유사한 사례에 그간 한국 사회의 응대가 어떠했는지를 물을 필요도 있겠다. 특정 계층의 권력 소유에 대한 믿음이 이렇게까지 유일무이한 사회적 규칙으로 재생산되게 허용한 사회적 책임은 과연 없는가.

자신의 권력을 가시화하는 것이 곧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라는 착시에 구조적 책임이 있다면, 텅 빈 인정 투쟁에 기계적 평등을 근거 삼아 지나치게 진지하게 응대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욕망에 부합하지 않는 모양의 타인을 억압하고자 하는 행위는 그것이 ‘정당하다’는 착각 속에서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한 줌 권력을 쥐어보고자 하는 환상에 불과하다. 남을 해쳐야만 겨우 존속되는 권력이란 폭력의 다른 이름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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