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심혜진 시민기자│4월 말 청양고추 모종 세 개를 화분에 심었다. 베란다 바깥 화분걸이에 고추 세 그루를 나란히 놓고 햇볕과 바람을 마음껏 쐬게 했다.

굵은 비가 쏟아지는 날엔 혹여 흙이 파일 새라 서둘러 화분부터 안으로 들여놓았다. 뭔가를 기르고 가꾸는 데에는 늘 진심인 편이지만, 손수 기른 고추를 맛보려는 생각에 더욱 정성을 쏟았다.

과연. 하얀 꽃이 피었다가 시든 자리에 녹색 열매가 달렸다. 기특한 마음을 담아 물을 듬뿍 부어주며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느낌이 싸했다. 잎 뒷면에 뭔가 자그마한 것들이 꼬물거리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진딧물이었다. 예전에도 고추 모종이 진딧물의 습격에 꽃 한 번 제대로 피어보지 못하고 시들어 죽는 걸 목격했다. 다행히 아직 많이 번지지는 않았다. 나는 얄미운 진딧물을 일일이 손으로 잡아 없앴다.

진딧물.(출처 픽사베이)
진딧물.(출처 픽사베이)

그날부터 저녁마다 잎과 꽃에 붙은 진딧물을 잡고 있다. 잡아도 잡아도 자꾸 나타나는 진딧물에 나는 아주 약이 오르지만, 곤충과 식물이 치열하게 진화해온 역사에 견주면 내 노동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린다.

사실 식물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곤충이다. 곤충은 종류도 다양하거니와 번식 주기도 빨라 자손을 많이 생산한다. 그러곤 맘에 드는 식물에 들러붙어 꽃의 진액을 빨아 먹고 잎을 갉아 먹는다. 식물의 최약점은 도망갈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식물은 비장의 무기인 독을 만들었다.

곤충도 속수무책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식물의 독에 적응하려 애쓴다. 식물은 곤충에게 먹히지 않으려 독을 만들고, 곤충은 이에 대응하고, 다시 새로운 독을 만들고...

이 끝없는 전쟁 속에 결국 그 독에 적응하는 단 하나의 곤충이 남는다. 그래서 곤충 중에는 편식이 심한 것이 많다. 배추흰나비 유충은 양배추나 배추 종류를, 호랑나비 유충은 감귤류만 찾는다. 아주 처절하고 집용한 공진화 관계다.

결국 아무리 식물들이 머리를 굴려 강한 독을 만들더라도 곤충은 기어코 해독법을 찾아내고야 만다. 식물도 방어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버리면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결국 식물이 먼저 타협점을 찾는 수밖에 없다.

이럴 땐 역으로 강한 독이 아닌 약한 독을 사용한다. 떫은맛을 내는 탄닌으로 곤충의 식욕과 소화력을 떨어트리거나 유충을 빨리 자라게 하는 호르몬으로 유충이 성체가 되는 시간을 단축해 최대한 먹히는 양을 줄이기도 한다.

이렇게 살벌한 싸움에서 약체 중의 약체인 진딧물은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진딧물의 천적은 무당벌레인데, 진딧물은 무당벌레를 쫓기 위한 보디가드를 고용할 줄 안다. 바로 곤충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군단을 이루는 개미들이다. 개미가 떼로 덤비면 그 어떤 곤충도 당해내지 못한다.

진딧물은 식물의 단백질만을 먹고 당 배설물을 개미에게 준다. 게다가 진딧물은 소처럼 커다란 포식자가 가까이 오면 풀과 함께 통째로 먹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땅바닥에 스스로 몸을 내던진다. 초식동물이 내뱉는 숨의 온도와 습기, 풀의 흔들림을 감지해 땅으로 과감한 점프를 하는 것이다.

아마 내 고추 화분의 진딧물들도 같은 전술을 사용했을 것이다. 사실 그동안 고추나무는 샅샅이 뒤졌지만 땅 위로 떨어진 진딧물까진 살피지 못했다. 내 불찰이 컸다.

그래도 다행히 내 화분들은 진딧물의 공습에도 꿋꿋하게 열매를 길게 뽑아냈다. 한 끼에 한 개씩, 귀하게 키운 청양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는다. 역시 내 손으로 기른 것이라 씨까지 맛있다. 잘 키워서 더운 여름 내내 알싸한 청양고추를 맛보리라. 쌀쌀한 바람이 불 즈음엔 무지막지하게 매워질 테지만, 부디 그때까지 잘 버텨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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