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수연 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류수연 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류수연 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인천투데이│어린 시절, 짜증스럽게 괴롭히는 누군가에게 ‘반사’라고 외치던 기억이 있는가. 그것은 일종의 경고이자 저항이었다. 상대에게 일일이 반응하지 않으면서도 ‘반사’라고 외치는 한 마디로 그 사람이 한 말과 행동을 그대로 되돌려준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끝은 그리 통쾌하지 않았던 경우가 더 많았다. 어느 순간이 되면 ‘반사’는 오히려 짓궂은 아이들의 전유물이 되기 일쑤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다수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더 집요하고 뻔뻔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젠더를 둘러싼 갈등을 보면 이러한 ‘반사’의 함정에 고스란히 빠진 것처럼 보인다. 처음 미러링이 나왔을 때 그것은 분명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성을 둘러싼 차별과 혐오를 거울에 비추듯 투영하는 언표는 인습화된 폭력에 대한 통쾌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어떠한가. 미러링은 그 주도권을 이미 약탈당했다. 더 질기고 뻔뻔한 이들이, 그것을 약자를 향한 조롱의 언어로 변질시켜버렸다. 폭력의 언어가 저항의 언어를 오염시키고 만 것이다.

젠더를 둘러싼 갈등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지만 최근의 일들은 더욱 염려스럽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정치권이다. 삼십대 중반의 젊은 정치인이 제1야당의 차기 대표로 유력하게 떠오르고 있다는 보도가 연일 나온다.

정치권의 인재 적체에 젊은 피가 수혈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리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열풍을 이끄는 것은 후보자의 정치적인 노선이나 리더십이 아니다. 젠더 갈등과 같은 이슈에 편승하는 태도가 이 열풍의 동력이라는 것은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젠더에 대한 관점이 퇴행을 보이는 것은 비단 정치권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다. 최근 인천여성가족재단이 연 ‘인천 페미니즘 소모임 지원사업’은 기존 공모와 다르게 사업 내용을 변경하면서 참가자들에게 거센 반발을 야기했다.

재단이 해당 사업설명회에서 사업명을 일방적으로 ‘양성평등 구축사업’으로 변경 발표했기 때문이다. 왜곡과 혐오에서 벗어나 제대로 페미니즘을 논하자는 애초의 의도가 변질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

페미니즘은 하나의 사상이기에 앞서 운동이고, 실천이며, 생활이다. 동시에 기득권에 대한 가장 결렬한 저항을 내포한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이 동시대에 환영받았던 적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럼에도 지금과 같은 배제는 대단히 위험한 수준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건가.

페미니즘은 젠더문제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사상이자 운동이지만, 그 전부는 아니다. 사회문화적 의미의 성(性)으로서 젠더는 페미니즘의 주된 사유 대상이지만 또한 그 전부는 아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이 운동을 대표하는 여러 집합들이 등장했지만, 그 하나하나의 결은 분명 다르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동격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사유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이를 짚어내지 않는 획일화는 또 다른 의미의 폭력이다.

현재를 돌아보라. 갈등이나 혐오라는 말이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사용된다. 사소한 일부터 거대한 범죄까지 같은 용어로 지칭되다 보니 차이는 사라지고, 차별은 오히려 정당화된다. 게다가 폭력에 오염된 언어를 되풀이하는 것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만든다. 그 결과 젠더도 페미니즘도 진흙탕 싸움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 지켜내야 하는 것은 다시금 언어의 품격을 되찾는 일이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 그 자체의 용어로부터 정밀한 검토가 시작돼야 한다. 차이와 의미를 짚어내는 일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천여성가족재단의 재고를 바란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오롯이 사유하고자 했던 그 처음의 진정성을 회복하기를 말이다. 그리하여 오늘의 페미니즘이 다시 건강한 논쟁의 장을 회복하는 일에 인천시민이 앞장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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