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심혜진 시민기자│내가 사는 지역은 곳곳이 재건축, 재개발 예정지다. 벽과 담벼락에 검고 붉은 스프레이로 엑스자(X)가 그어진 좁은 길을 종종 지나간다. 최근까지 사람과 반려동물이 정답게 살던 곳이련만 어느새 풀과 이끼로 뒤덮인 집들을 보고 있자면 묘한 기분이 든다.

오래된 건물에 깃든 영령들이 마을을 떠난 이들을 그리워하며 담장 너머 고개를 쑥 내밀 것만 같다. 혹 그 영령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나는 신내림을 받아야 하는 걸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이 그 순간만큼은 나를 압도한다. 귀가 쫑긋 서고, 발걸음이 절로 빨라진다.

며칠 전에도 한껏 예민해진 채로 그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희한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느다랗고 높은 소리. 이 폐허와 어울리지 않는, 에스에프(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야말로 초현실적인 소리. 심지어 그 소리는 내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위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뭐지? 외계 생명체가 나를 납치라도 하려는 건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내 옆에 나타난 건 부드러운 곡선의 승용차 한 대였다. 차가 이토록 가까이 와 있는 줄 몰랐으니 가뜩이나 놀란 가슴에 폭탄이 떨어진 건 당연지사. “엄마야!” 비명을 지르는 나를 버려둔 채, 차는 낯선 소리와 함께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꽁무니의 파란색 차량번호판은 저 녀석의 정체성이렸다! 바로 전기차였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사진출처 픽사베이.

도로에서 전기차를 종종 보았지만, 다른 차량 소음에 가려 오롯한 구동음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기존 차에서 나는 ‘부르릉’ 소리는 엔진(engine)에서 나오는 배기음이다. 엔진은 에너지를 기계적인 힘으로 바꾸는 장치를 말하는데, 휘발유나 등유를 태워 생긴 열에너지로 엔진을 돌린다. 기름을 태워 생긴 기체는 머플러를 통해 차 밖으로 나가면서 소리를 남긴다. 자동차의 방귀 소리랄까.

전기차는 석유 대신 배터리에 충전된 전기를 연료로 모터를 움직여 굴러간다. 석유를 태울 필요가 없으니 기체가 발생하지 않고, ‘윙~’하는 약간의 전기모터음 이외에 소리가 나지 않는다. 전기차는 도시 전체의 소음을 줄이는 데 분명 도움이 된다.

소리가 없다는 것이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차량이 고속으로 움직일 땐 도로와 바퀴 사이 마찰음이나 공기를 가르는 바람 소리가 들리지만, 문제는 저속으로 주행할 때이다. 길을 걸을 때 차량의 소리를 듣고 보행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해왔는데, 소음이 없으니 보행자는 차량이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알아채기 어렵다. 사고가 날 위험이 커지는 것이다. 특히 시각장애인과 노인층에겐 더욱 그렇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일부러 배기음을 발생하는 장치를 차량에 부착하도록 의무화했다. 유럽도 차량 속도가 30km/h에 이를 때까지 일정 수준의 배기음을 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렇다면 전기차에서 어떤 소리가 나면 좋을까. 전기차의 이미지에 잘 어울리는 소리는 무엇일까. 전기차 생산업체들은 소음을 위한 소리 없는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 중이다. 한 기업은 인터스텔라, 다크 나이트, 라이온 킹 등 유명한 영화음악을 작곡한 한스 짐머와 전기차 전용 소리를 제작했다.

시동을 걸고 끌 땐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주행 중엔 속력에 따라 네 단계의 소리가 난다고 한다. 다른 기업들도 소리에 차량 브랜드의 정체성을 드러내려 애쓰는 중이다. 보행자, 운전자를 위한 소음만이 아니라 로드킬을 방지하기 위한 고주파 발산 기능도 추가할 수 있다니 뭇 생명의 죽음을 줄일 작은 가능성도 열렸다.

내 옆을 지나간 전기차 소리는 일반 차량에 비해 현저히 작았다. 아직 이 소리에 익숙하지 않은 나 같은 이들에겐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 오래된 건물이 허물어지는 곳에서 맞닥뜨린 미래의 소리. 차 소리는 당연히 ‘부르릉’인 줄로만 알았던 나날. 당연하던 것들이 하나하나 해체돼간다. 그리 나쁘지 않은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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