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희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연구원

홍인희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홍인희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인천투데이│부동산 투기대책의 일환으로 부동산 담보 대출의 비율이 기존에 비해 현저히 낮아졌다. 게다가 얼마 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투기처럼, 신도시 개발 정보마저 접근 할 수 없는 일반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사람들은 부동산에 투자할 정도의 큰돈은 없고 그보다 적은 돈으로 시작할 수 있는 주식이 그나마 우리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 주변에도 주식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를 대변하듯 작년 주식시장에 300만 명의 개인투자자가 신규 유입됐으며, 그중 53.5%가 30대 이하로 집계됐다.

‘개항기 정기미시장의 도입과 미곡 거래 방식의 다변화’(김기성, 2020, 한국사연구)라는 최근의 연구에선 증권시장의 모태가 되는 인천미두취인소을 다뤘다. 과거나 지금이나 일확천금을 바란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게 시작 됐는지 내용을 살펴보자.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 인천에는 지금의 증권거래소인 인천미두취인소가 설립됐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미곡은 자연 재해와 전란 등에 따라 가격 변동이 심했다.

인천미두취인소에선 선물거래와 청산거래 방식의 거래가 있었다. 선물거래는 앞으로 생산되거나 도착할 상품을 대상으로 거래하는 것이다. 청산거래는 매매를 약정하고 나서 자유롭게 전매(轉賣)하다가 일정한 기간에 당도하면 물건과 대금을 주고받는 거래이다.

이러한 거래는 불안정한 시장상황에서 상인이 위험을 회피하려는 목적이었다. 예측 불가능한 단기 변동에서 일정한 시기에 정해진 가격으로 미곡을 확보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인천미두취인소는 직거래(直去來), 연불거래(延拂去來), 정기거래(定期去來)를 통해 쌀, 콩, 석유, 명태, 방적, 금건(金巾), 목면의 물품을 취급했으나 실제로 정기미 거래 외에는 거의 실행되지 않았다.

이러한 인천미두취인소는 일본인이 일본영사대리 등의 동의를 얻어 설립했다. 미곡의 표준가격과 품질의 확립을 통한 원활한 거래 도모, 표준상품 거래를 통한 품질개량, 표준가격 설정을 위한 매집경쟁 폐해 방지라는 표면상의 목표를 내세우긴 했다. 그러나 결국은 원활한 미곡 수출을 위한 것이었다.

증거금과 수수료만 낼 수 있으면 누구나 자신이 가진 자본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의 미곡을 거래하고 이윤도 볼 수 있었다. 취인소의 감독을 철저하게 한다 해도 투기의 도구가 되기 쉬워 폐해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일본에서도 이미 증명됐다.

그런데 부산에서도 무역의 침체와 이윤의 감소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부산미두취인소를 설립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엔 무산됐다.

당시 인천은 창고 시설이 잘 갖춰져 거류지의 은행과 서울에서도 금융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장소였다. 여기에 인천미두취인소가 생기면서 미가가 하락하는 시기에 미가 상승을 기다리며 저장할 수 있는 창고도 생겼다. 그래서 미곡은 인천으로 모여들었다. 이러한 미곡의 집산력은 정기미 시장의 동력이 됐다.

해산과 폐쇄 등의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인천미두취인소는 1896년부터 1932년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과 합병될 때까지 36년간 전국의 미두꾼과 권력자들을 끌어 모았다. 이를 통해 자본은 끊임없이 자기 복제와 확산을 반복했다.

고일 선생은 <인천석금>에서 ‘미두로 패가망신했다는 사람은 많았어도 치부(致富)를 했다는 소식은 별로 없었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사전적 의미로 투기(投機)는 ‘기회를 틈타서 큰 이익을 얻으려고 함’이며 투자(投資)는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자금을 대거나 정성을 쏟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전으로도 투기와 투자의 차이를 잘 모르겠으나 그 사이 어디쯤에서 125년 전이나 지금이나 주린이(주식 초보)들은 여전히 증권시장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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