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동희 극작가
출근을 서두르는 아침,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아파트 경비를 보는 어르신이 서류철 하나를 조심스레 내밀며 아파트 입구의 현관문 자동화에 대한 동의 서명을 받는다는 설명과 함께 우리 집 호수의 빈칸을 손가락으로 짚어주신다.

그러고 보니 대표자회의 결정 사항이라며 자동화의 경제성과 안전성에 대한 내용이 며칠 전부터 게시판에 붙어 있었던 게 생각난다.

서명을 꼭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그렇다면서 당신의 실적이 저조해 핀잔을 들었다고 하신다. 꼭 찬성해야하는 거냐고 다시 물으니, 반대를 해도 된다는데 서명용지에는 찬반의 구분은 따로 없다.

대부분이 찬성하더라는 어르신의 말씀이 어딘가 허전하다. 자동화 설치가 완료되면 더는 어르신을 못 보게 될 터이니 그럴 만도 하다.

경비를 따로 두지 않는 아파트가 점점 늘어나, 20년이 다 되어가는 우리 아파트도 사람 대신 기계가 경비를 대신하게 될 모양이다. 가끔 다른 집을 방문할 때 미리 약속을 했는데도 주차장 입구와 현관 초입부터 다시 인터폰을 누르고 집주인의 동의를 구해야 해서 참 마땅찮게 생각해왔는데, 이젠 우리 집을 찾는 이도 현관에서 기계에다 대고 도착을 고(告)해야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게 됐다.

자동화를 하겠다는 당위성을 모르는 바 아니다. 주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고 인건비 절감으로 관리비까지 줄여준다니 굳이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마는, 사람끼리 부딪히는 정나미라고는 점점 찾기가 어렵게 됐다. 집이 빈 시간에 배달된 택배 물건을 대신 받아주던 감사함조차 나눌 수 없게 됐으니 말이다.

또 하나, 결국엔 경비를 없애겠다는 동의서를 경비를 보는 이들에게 맡긴 처사도 못마땅하다. 여러 사정에 의해 불가피하게 자동화를 하게 됐더라도, 그동안 애써준 이들의 일자리를 없애는 일이라면 조금은 미안한 일이 아닌가. 이참에 동 대표들이 얼굴도 모르고 지내는 이웃들과 서로 얼굴도 익힐 겸 나섰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얼마 전에 작은 지역단위의 문화가 중요하다는 지역문화에 대한 포럼에 참가해서 여러 의견을 들은 적이 있다. 토론회의 내용을 짧게 줄이면 ‘생활문화’와 ‘문화공동체’로 요약되는데,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에서 함께 나누는 공동체 형태의 문화가 좀 더 다양하고 폭넓게 형성돼야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가단위나 광역단위의 전시적이고 다분히 정치적인 문화행사에 식상한 시민들에게 생활과 밀착된 지역문화는 충분히 대안이 될 수 있고, 시민들이 문화를 제대로 향유하는 방안으로 마을이나 사랑방 형태의 작고 다양한 공동체가 제시됐다. 이미 여러 지역에서 시도돼 호응을 얻고 있는 사례들도 발표됐고,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제도적이고 행정적인 뒷받침에 대한 의견들도 쏟아졌다.

당연하고 귀한 말씀들이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같이 살아가는 이웃들이 문화를 일구고, 그 문화로 공동체를 이루었으면 좋겠다. 앞뒷집에 누가 사는지, 아래윗집 사람들은 무얼 하는 사람인지조차 모르고 서먹하게 사는 게 다반사인데 문화로 그 벽을 허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잘 될까, 하는 걱정이 가시질 않는다. 중소도시나 농어촌, 혹은 일반 주택가라면 이미 나누고 있는 정서적 기반을 바탕으로 생활문화공동체가 낯설지 않겠지만 대단위 단지나 뉴타운 식으로 이름 붙은 도시구조에서는 어떻게 만들어갈지 궁금하다. 우리의 삶이 ‘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말라’는 식으로 겹겹의 문을 만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어서다.

자동문으로 외부 사람들과 경계를 분명히 하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만이라도 좀 더 가까운 ‘우리 이웃’이 ‘자동’으로 되는 걸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할 거 같다.

현관문을 자동화로 바꾸겠다는 서명용지에 일부러 반대라는 표기를 따로 해두었다. 이미 결정된 사안에 잘난 척 비토를 놓는 게 아닐까, 아울러 서명을 받은 경비 어르신이 곤란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가 들어 여태껏 마음이 개운치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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