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팬데믹│안재원│이른비

인천투데이=이권우 시민기자(도서평론가)│누군가 불현듯 던진 한마디가 작지만 의미있는 깨달음을 줄 적이 있다. 후배가 서양사는 역병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라고 했을 때 그렇겠구나, 했다.

과학과 의술이 발전하면서 한동안 잠잠해졌을 뿐, 오랫동안 인류는 감염병에 시달려 왔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양보다는 서양에서 감염병이 자주 발생한 듯싶다.

서구 문학사의 대표적인 작품이 감염이 창궐한 시공간을 무대로 삼은 일이 여럿인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안재원의 ‘아테네 팬데믹’은 고대 그리스인은 역병의 시대를 거치고 나서 공동체를 운영하는 원리를 어떻게 바꾸고자 했는지 일러주고 있어, 코로나 팬데믹을 겪는 오늘의 우리에게 맞춤한 책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에우리피데스의 ‘미친 헤라클레스’, 플라톤의 ‘국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전거로 삼아 “역병은 어떤 정치를 요구하는가”를 풀어간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얼핏 보면 역병과 관련 없이 보이지만, 이 전쟁의 초기에 아테네 진영에 역병이 돌았다는 점을 새삼 주목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투키디데스가 역병이 창궐하는 과정은 소상히 기록했지만, ‘역병을 물리치고 극복하는 과정은’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신, 포스트 팬데믹 양상에 주목해서 역병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 아테네 사람들에게 나타난 마음의 상태를 관찰해 기록했는데, “더 많이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을 강조했다. 아테네가 시칠리아 원정에 나섰다가 스파르타에 패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오이디푸스 왕’을 해설한 대목도 인상 깊었다. 테베에 역병이 돌자,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신탁으로 알아봤다. 신탁은 어떤 더러움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더러움은 선왕을 죽인 짓이고, 그 살인범을 추방해야 역병은 사라진다.

그러니, 이 역병은 “사회질병인 동시에 정치적인 사건”이었단다. 잘 알다시피, 이 역병의 원인 제공자는 오이디푸스 왕이었다. 비록 아버지인줄 몰랐지만 사소한 일에 혈기를 부려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다.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 왕은 당당히 그 죗값을 치른다. 눈을 찔러 멀게 하고, 왕위를 내놓고 나라를 떠났다. 소포클레스는 위기의 시대 정치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성실함, 진실함, 책임감”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도 역병이 나온다. 아가멤논의 오만과 고집 탓에 아폴론이 그리스 진영에 역병을 일으켰던 것. 이 과정에서 널리 알려진 ‘일리아스’의 첫 번째 주제가 나온다. 아가멤논에게 맞섰던 아킬레우스의 분노.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현실추수주의 정의관을 비판하는 분노인 셈이다.

두 번째 주제는 파트로클로스를 잃은 아킬레우스와 헥토로를 잃은 프리아모스가 극적으로 화해하는 장면에 스며 있다. 지은이 말대로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원수도 적군도 아니었다. 그저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은 한 인간들”이었다. 그러기에 이 두사람은 가장 사랑한 사람을 잃은 분노를 삭히고 극적으로 화해한다. 여기에서 “친구를 사랑하고 적을 미워하라는 배제주의적 정의관”이 무너진다.

플라톤의 ‘국가’도 ‘일리아스’와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지은이는 돋을새김한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과 벌인 논쟁에서 비록 대중이 강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 정의라 여기더라도, 실제로 “그것은 불의에 불과하며 이렇게 행해진 불의는 국가를 내분과 내전으로 몰고가서 최악에 이른다는 것”을 깨우치고자 했다.

더불어 플라톤은 배제주의적 정의관은 전쟁을 벌이고 동맹을 맺을 때는 효과가 있지만 내전을 일으키고 당파를 짓는 데 이용당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분열된 공동체를 하나로 단합하는 데는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인이 역병과 싸우면서 얻어낸 지혜는 오늘 우리에게도 절실히 요구된다. 역병은 한 체제를 지탱해온 것을 다 무너뜨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데 유효한 새로운 정의관을 세워야 한다고 촉구한다. 가진 자의 만용, 혐오와 배제의 틀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희망이 보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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