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인천투데이ㅣ청라국제도시는 바다 위에 만들었다. 청라도를 맨 앞에 두고 주변 섬들 사이를 매립해 도시를 건설했다. 시야가 잘 트여 있고 땅도 넓다. 이곳에 갈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다. 북인천항이다.

일본이 당시 서곶과 주안의 해안을 매립해 만들려던 항만이다. 시도는 했으나 완성하진 못했다. 일본이 놓고 간 과제는 동아매립지를 거쳐 청라국제도시로 절반이 완성됐다. 주안공단 자리까지 배가 들어오게 할 생각이었으니 일본이 구상한 계획이 앞으로도 완전히 실현되긴 어려울 것 같다.

지금의 부평시장은 소화토지구획정리사업의 결과물이다. 소화는 일본의 연호를 말한다. 일본은 이곳이 상업지구로 번성하길 바랐다. 그래서 로터리를 만들고 토지를 정비했다. 장래의 소비층으로 삼은 타깃은 인근에 있던 인천육군조병창이나 공장의 노동자들이었다.

하지만 일부 구역에 건물이 들어선 것을 끝으로 이 사업 역시 미완성인 채 중단됐다. 광복 후 그것을 이어서 추진한 게 1970년에 끝난 ‘부평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다. 이 사업을 통해 지금은 상가들이 촘촘히 들어선 인천의 대표적인 상업지구로 남게 됐다.

한강과 인천 앞바다를 연결하는 운하 건설이 구체적으로 기획된 것 역시 일제강점기다. 경인운하는 앞서 말한 북인천항 개발 계획과 연결된 사업이었다. 계획 단계에서 끝난 이 구상은 박정희 대통령 때 율도항이니 부평항이니 하는 항만 건설과 함께 다시 거론됐다가 현재의 경인아라뱃길로 실현됐다.

다른 지역의 사례이긴 한데, 현재의 중앙선이란 철도 이름은 조선총독부가 건설한 중앙선에서 유래한다. 일본은 처음에는 중앙선으로 이름을 붙였다가 곧 경경선으로 바꿨다. 경성과 경주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든 명칭이다. 일본에도 같은 이름의 철도가 있어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경경선은 1948년에 중앙본선으로 다시 이름을 바꾼다. 이 철도는 본래 한반도 오지의 자원을 운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복 후 ‘중앙’이란 명칭을 다시 갖다 쓰는 데 있어 타당성이 논의된 적은 없다.

이런 사례는 이외에도 많다. 그리고 이러한 대규모 사업들은 대개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진행된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다. 일본이 패전하면서 사업들도 중단됐고, 그렇게 멈춘 사업들은 약속이나 한 듯 광복 후 다시 고개를 내민다.

전시체제에 맞춰 추진된 공사들이 대한민국 정부 아래에서 국가발전이란 이름으로 계승됐다. ‘산업보국’이란 구호도 여전히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식민지가 아닌 현 시대에도 적합한 사업인지, 진지한 논의를 거친 적은 없다.

1930년대에 일본이 내건 정책 중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이 현해탄을 가로지르는 해저터널이다. 부산에서 대마도를 거쳐 규슈로 연결시키겠다는 구상이었다. 최근에 이 해저터널 이야기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친일’ 문제로 연결시키는 모양이지만, 그보다는 이 터널의 필요성이 근거도 확실하지 않은 경제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는 게 아쉽다. 해저터널은 필연적으로 북한과의 관계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수십 개국을 연결하는 아시안하이웨이 계획에도 한일 해저터널 구상이 제기되고 있다. 역시 도로가 북한을 관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미일 동맹의 강화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아래에서 한국은 대중국 견제 역할을 지속적으로 강요받는 중이다.

바다 밑 터널에 관심을 기울이는 동안 미국은 전시작전통제권 반환을 거부했다. ‘한미동맹 위기관리 합의각서’는 ‘미국 유사시’란 문구를 놓고 진통을 겪는 중이다.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자리 잡지 못한다면 한일 해저터널은 무용지물이다. 일제강점기에 겪은 한반도의 전시체제는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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