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마중물 회원, 전 인천장애인부모연대 회장)
남편이 소속돼있는 산악회가 주최하는 늦가을 단풍구경 놀이에 따라 나서기로 했다. 등산이라고는 동네 뒷산인 계양산을 고작 한 달에 한 번 정도 올라간 내가 지리산을 등반할 수 있을까?

남편은 일주일을 남겨놓고 나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시작했다. 등산용품점에서 신발, 잠바, 모자, 등산용 스틱 등 이것저것을 골라 거금을 카드로 결제하고, 저녁마다 동네를 두 바퀴씩 돌게 했다. 남편은 지리산이 높지는 않지만 계곡이 깊은 피아골로 몇 시간을 내려오기 때문에 다리 힘을 길러야한다고 이 훈련의 이유를 설명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새벽부터 비가 왔다. 아래 지역은 비가 오지 않기를 기대하며 걱정 반 설렘반으로 새벽부터 서둘렀다. 그러나 비는 전국적으로 오는 모양이다. 지리산 자락에도 촉촉하게 비가 내렸다.

우산 쓰고 비옷 입고 19년 만에 처음 지리산에 왔는데, ‘이것도 추억이라고 생각하자’는 주문과 함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자 했다. 노고단, 임걸령, 피아골 계곡으로 내려오는 일정을 시작했다.

올라가는 길은 험하지 않았지만 비가 와서 그런지 숨이 차오르고 힘들었다. 피아골을 내려오는 길에서 만난 계곡은 비가 와서 그런지 우렁차고 멋졌다. 이렇게 피아골 중간까지는 경치에 감탄하면서 내려왔다. 그런데 간간이 무릎에 통증이 오더니 급기야 주차장까지 2km 남겨 두고 남편 등에 엎혀 내려왔다.

다음날부터 물리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다녔고, 불편한 몸으로 사람들을 만나러 집을 나섰다. 그런데 무엇을 타고 갈 것인가가 제일 큰 걱정거리였다. 걸어 다니기엔 너무 멀어,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야 했다. 그런데 지하철의 경우 계단 오르기가 너무 힘들었다. ‘아하! 지하철 엘리베이터!’

평상시에는 장애인들만 타는 거라 생각하고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유용한 것인 줄이야.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지하1층밖에 없었다. 지하1층에서 내려서 다시 지하철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찾기 위해 돌아서 갔더니 그곳 엘리베이터는 표를 찍고서야 지하철로 내려갈 수 있었다. ‘처음부터 잘 설계했다면 예산도 절약하고 이런 번거로움도 없을 텐데…’

얼마 전 지하철 입구까지 힘겹게 쉬었다 가다를 반복하시는 할머니에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라고 했더니, 너무 돌아서 길을 못 찾겠다고 하신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이해를 못했지만 막상 내가 당해보니 알 것 같았다. 이래서 사람은 경험하고 아파봐야 하는가보다.

그런데 이러한 불편한 장애인 편의시설도 그동안 장애인들의 싸움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땜빵식의 시설이 만들어졌을까. 그것은 장애인 편의시설을 장애인의 의견과 경험을 배제한 채 비장애인이 설계하고 만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중도장애가 90%라는 사실에서 임산부, 노인 그리고 나처럼 비장애인도 언제든지 일시적 또는 영구적 장애를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면, 이런 시설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그래서 장애인들의 지속적인 요구에 대한 임기응변적인 대처의 결과물이자 경제적인 효율의 관점에서 설계된 정부의 탁상공론식 장애인 편의시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이런 장애인 시설이 만들어진 보다 근본적인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장애인들이 이동권 보장을 위해 지하철로를 쇠사슬로 묶고 막을 때, 시민들은 바쁜데 여러 사람 피해준다고 투덜거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아프면 집에 있지 왜 나와서 다른 사람 힘들게 하느냐고 목소리 높였다.

만약 우리 시민들이 지하철 탈 때마다 나도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장애인들은 어떻게 타느냐? 왜 탈 수가 없냐. 장애인들은 사람도 아니냐!’고 생각하면서 정부에 손가락질만 했어도 철로에 장애인들이 몸을 묶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편의시설’이 아닌 ‘전시용 시설’이 만들어지고 있을 때 무관심했다.

장애인들이 죽을힘을 다해 투쟁을 통해 만든 편의시설이 장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임산부, 노인, 아동 등 모든 시민을 위한 시설이 되고 있다. 앞으로는 장애인들만이 아니라 시민들 모두가 자신의 권리라는 자각에서 진정한 공동체의 편의시설을 만들어야하지 않을까.

※ ‘마중물칼럼’은 사단법인 ‘마중물’ 회원들이 ‘상식의 전복과 정치의 회복’을 주제로 토론하고 작성한 칼럼입니다. 격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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