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천혜의 요새 삼랑성과 전등사 ⑩

인천투데이ㅣ

‘정족산사고’와 ‘취향당’

정족산 가궐지를 나와 왼쪽 산길로 접어들면 삼랑성 서문으로 가는 길이 나오는데,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로 150m 정도 올라가면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와 ‘취향당(翠香堂)’이 있다. 1990년대 초반에 이곳을 찾았을 때 사고와 취향당은 다 허물어져 빈 터만 남았다.

특히 사고지는 철제 울타리가 둘러쳐 있고 울타리 안쪽으로 나무와 풀들이 마구 자라 아래쪽에서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발에 거치적거리는 풀숲을 뚫고 들어가 주춧돌들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었다.

정족산사고(조선고적도보 1931년).
정족산사고(조선고적도보 1931년).
정족산사고 복원 공사 중(1998년).
정족산사고 복원 공사 중(1998년).

‘정족산사고’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다. 다만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사고’의 사진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1931년 전후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1998년에 전등사 기행안내를 맡아 정족산사고지에 대해 알려주려 이곳에 들렀는데, 정족산사고 복원 공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우연히 대중에게 공개되기 전에 현장을 미리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실록(實錄, 역대 제왕의 재위 기간의 일을 날짜 순서에 따라 적은 기록)을 보관하는 ‘장사각(藏史閣)’은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인데, 가운데 판문을 달은 기둥 2개만 외부로 노출됐고 나머지 기둥 4개는 밖으로 방화벽을 두껍게 쌓아 기둥의 상부만 보인다.

창호는 전면에 3개소, 뒷면에 3개소 판문으로 설치돼있다. 전면 양끝의 창호는 통풍과 채광용 창으로 들어 열개 형식의 판문이며, 정면 중앙과 뒷면의 창호는 출입이 가능한 쌍여닫이 판문이다. 방화벽 아래쪽에는 습기 등으로 실록이 훼손되지 않게 환기구를 두고 있다.

지붕 형태는 맞배지붕으로 양 측면에 방풍판을 붙였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강회와 백토를 섞어 사다리꼴로 높여 마감한 양성바르기를 하고 상부에는 수키와를 얹었다. 그리고 용마루 양끝에는 망새(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장식용으로 얹는 용 모양의 기와)를 설치했다.

장사각과 선원보각.
장사각과 선원보각.
취향당.
취향당.

왕실의 족보를 보관한 ‘선원보각(璿源寶閣)’은 정면 3칸, 측면 3칸 건물로, 측면의 앞 1칸은 퇴칸으로 구성했다. 창호는 전면에 3개소를 설치했다. 가운데 설치된 창호는 쌍여닫이 만살창(창살이 가로세로로 촘촘히 짜인 창문)이고, 전면 양끝의 창호는 문틀을 짜고 널판을 댄 우리판문으로 출입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 지붕의 형태와 방풍판, 용마루와 내림마루, 망새 등은 장사각과 동일한 형태이다.

강화 사고는 인조 6년(1628)에 강화도 마니산에 설치해 전주사고본을 보관했으나 효종 4년(1653) 사각의 실화사건으로 불타게 되자 새로 정족산성 안에 장사각과 선원보각 건물을 짓고, 헌종 1년(1660)에 남은 역대 실록들과 서책들을 옮겼다.

그러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은 뒤부터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옮겨져 보관하다 1930년에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으로 옮겨진 뒤, 광복 후 서울대학교로 개편되면서 서울대학교에 옮겨 보존 관리하고 있다.

숙종 33년(1707)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정족산사고’를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 지었다. 이곳은 장사각과 선원보각을 수호하고 관리하던 곳이다. 영조 2년(1726년)에는 영조가 친히 이곳에 행차해 ‘취향당’이란 어필을 하사했고, 순조·고종시기에는 정족진을 두어 정족산사고를 수호하게 했다. 전등사의 소속 승병과 춘추관 소속의 기사관(記事官)이 취향당에서 건물을 맡아서 지켰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랑성 한 바퀴

암문 형태의 삼랑성 북문.
암문 형태의 삼랑성 북문.

‘정족산사고’ 담장 길을 따라 뒤로 150m 정도 오르면 삼랑성의 북문이 나온다. 그런데 북문의 모습이 남문이나 동문처럼 규모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정도로 좁은 문으로 돼있다.

보통 산성에서 이 정도 규모의 문은 암문(暗門)으로 사용한다. 암문은 주로 일반인이나 적들이 알지 못하게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만들어, 비밀리에 물자를 조달하거나 군사를 이동시키기 위해 만든 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문루를 세우지 않고 성곽을 뚫어서 만드는데, 북문이 암문의 형태와 똑같은 것으로 보아 암문으로 사용됐으리라 추정된다.

산성 걷기는 주로 성벽 위를 따라 걷기에 제대로 성벽을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북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가면 숲으로 길이 이어져있는데, 산 아래 온수리의 ‘길상119안전센터’로 연결된다.

그리고 성벽 좌우로도 길을 만들어 성벽을 관찰할 수 있게 했다. 크고 작은 막돌들로 허튼층쌓기(크기가 다른 돌을 줄눈을 맞추지 아니하고 불규칙하게 쌓는 일)를 했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돌을 조금씩 뒤로 쌓아 경사를 둬 성벽에 안정감을 줬다.

북문에서 정족산 정상으로 올라가며 가끔 뒤를 돌아보기 바란다. 산성 너머로 염하가 보이며 펼쳐지는 풍광이 꽤나 아름답다. 그래도 역시 정상에서의 조망이 가장 멋진 것 같다. 서쪽으로부터 석모도, 진강산, 덕정산, 길정저수지, 대모산, 염하, 김포 등 동쪽 끝까지 눈앞에 막히는 것 없이 펼쳐진다.

서남쪽으로는 마니산과 그 아래로 분오저수지와 분오항, 남쪽으로는 길상산이 보인다. 그리고 넓게 펼쳐진 논들 중 관개수로가 곧장 뻗어 있고 농지 정리가 잘된 경작지의 대부분은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간척사업을 한 결과이다.

정족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최고의 풍광.
정족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최고의 풍광.

서문 가까이에 크게 돌출된 치(雉,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돌출시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격퇴할 수 있게 만든 성벽 시설물)가 있는데, 이곳까지는 길도 성벽도 정비하지 않아 조심스럽게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이 치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격퇴하는 목적보다 전방을 관측하는 목적이 더 중요했을 것 같다. 조선 후기 이전에 앞의 논들은 바다여서 배를 타고 들어오는 적을 감시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에만 돌로 튼튼하게 만든 수구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장소였을 것이다.

서문까지는 산성과 길이 정비가 잘 돼있어 편하게 내려갈 수 있다. 서문은 동문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막돌로 문의 기둥을 쌓고 그 위에 벽돌로 홍예를 가지런히 올렸다. 서문에는 성문이 달려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항상 자물쇠로 닫아놓아 한 번도 성문 밖을 나가보지 못했다. 서문부터 남문까지는 성벽을 수리하고 정비해놓았지만 경사가 가팔라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으니 무릎이 시원치 않은 분들은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서문에서부터 돌계단이 끝나는 곳까지는 여장(성가퀴)을 쌓았고 여장 하나에 현안(懸眼,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물리칠 수 있게 만든 구멍) 하나를 내었다. 이 계단을 다리가 퍽퍽하게 올라가면 죽 뻗은 평지가 나오는데, 바로 왼쪽에 커다란 돌무더기가 있다.

이곳에 앉아 목을 축이며 쉬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전등사 경내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전등사를 돌며 볼 수 없었던 전각까지 다 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다. 이곳에 앉으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편안해져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가 싫다. 그대로 돌이 되어 전등사 풍광과 함께 천 년을 이어가고 싶다면 욕심이 과한 것일까.

전등사 전경.
전등사 전경.

이곳에서 완만한 경사를 따라 300m쯤 내려가면 여장을 쌓은 치가 나오는데, 길은 완만한 경사에 잔디가 깔려있고 솔밭이 펼쳐져 시원한 느낌이다. 잔디밭 중간에 세월을 온몸에 새긴 구불구불한 소나무들과 옛이야기를 나누며 내려가도 좋을 것 같다. 풍광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왼쪽으로부터 덕포진, 초지진, 초지대교와 항산도, 세어도 등 염하의 입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계속 감탄을 하며 내려간다. 아마도 길 끝에 치를 설치한 이유는 부근의 산세가 낮아 적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염하 입구에 들어서는 적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도 있을 것 같다.

남문으로 내려가는 길은 여장 옆으로 큰 돌들로 계단을 쌓았는데, 삼랑성 구간 중 경사가 가장 급한 곳이다. 예전에는 그냥 산길이어서 그리 어렵게 내려가지 않았는데 돌계단이 만들어진 후 잘못 내려가면 무릎이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전등사를 찾는 분들에게 삼랑성 걷기를 권하고 싶다.

그리 높지 않은 정족산(220m)을 둘러싼 삼랑성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드는 반나절의 산보, 거기다 멋진 풍광이 끊임없이 펼쳐져 세상사 시름을 잊는 호사가 덤으로 오니 금상첨화(錦上添花)란 이를 일컫는 것이리라.

※ 강화도는 아직 여러 코스가 남았는데 코로나로 인해 대부분의 관광지가 폐쇄돼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됐습니다. 강화도 글은 코로나가 종식된 후 잇기로 하겠습니다.

※ 천영기 시민기자는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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