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인천투데이ㅣ함봉산 자락의 동굴들은 꽤 오래 전부터 지역 주민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한 15년 전부터는 부평광산이나 인천육군조병창 내 지하시설 등과 더불어 이 동굴들을 활용하려는 계획도 간간이 제기되곤 했다. 그만큼 도심지에서 쉽게 보기 힘든 시설들에 주민들의 관심은 컸다.

이제 부평미군기지 개방을 시작했고, 일본군이 병참기지를 만들기 위해 다리를 놓고 물길을 손봤던 기지 주변 하천, 즉 굴포천이라고 부르는 복개 하천까지 복원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게다가 산곡동 한가운데에 있던 육군 보급부대도 자리를 옮길 참이다. 그야말로 경치동지할 만한 일이요, 상전벽해를 앞둔 시점이다. 여기저기서 계획도가 나오고, 이곳저곳에 답사객들이 몰려드니 마치 달리는 말 등에 올라타 꽃구경을 하는 심정이다.

빠르게 스쳐가는 변화가 그럴듯해 보이긴 해도 도시의 어떤 유산을 현장에 구현하려는 것인지, 무엇을 위해 장소를 재현하려는 것인지, 얼핏 봐서 알아채는 게 쉽지 않다. 사업마다 동기도 제각각이고 목표도 다르다. 그러다보니 넓지 않은 지역인데도 ‘네트워킹’이 없다. 전체를 관조할 수 있는 지휘본부도 없다.

중심 조직이나 인력이 없다 보니 사업에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불균형을 초래한다. 부평미군기지 반환공여구역에 많은 예산과 인적자원이 투입되며 건물 보존이 논의되는 반면, ‘검정사택’은 하루아침에 폐허로 남게 됐고, 부평광산을 개발해 원도심을 활성화한다는 계획이 발표되는 한편, ‘삼릉(미쓰비시) 사택’에는 붉은색 ‘철거’ 표시만 난무한다. 심지어 국내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원형의 모습을 간직한 산곡동 영단주택지는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 부평에 남아 있는 근ㆍ현대 도시 유산을 서로 연결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 대표적 사례가 성급한 평화박물관 구상 발표다. 곳곳에서 강제동원 문제를 거론하니 여기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가칭 부평평화박물관은 ‘일제강점기 강제노역’을 주제로 한다고 발표됐다. 강제동원이 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긴 하지만, 부평의 근ㆍ현대 유산을 모두 아우르는 주제는 아니다. 캠프마켓 부지의 역사성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테마도 아니다.

부평은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대부터 군용지로 지목된 땅이었다. 조선주차군의 주둔지였던 용산의 일본군들이 이곳까지 행군해 와서 군사훈련을 했다. 그것은 곧 공식 ‘연습장’으로 확장됐고, 토지를 수용하며 훈련용 시설들이 여러 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인천육군조병창이 생긴 건 이러한 전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일본군의 행군에 논밭은 짓밟히고 군마의 질주에 근처에 있던 산모가 유산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이 부평에 조병창이 생길 때까지 반복됐다.

1945년 초가 되자 일본군은 조선에서 ‘자급자전(自給自戰)’을 꾀했다.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부대별로 최후 항전을 준비한다는 계획이었다. 여차하면 ‘옥쇄’까지 불사했을지 모른다.

‘부평토굴’이 이른바 ‘격납 동굴’로 기획된 것도 이 무렵이다. 공습에 대비한 ‘분산 방호’를 위해 함봉산 일대에 지하시설과 반지하시설을 만들었다. 실탄 등이 이곳에 옮겨졌고, 현재 산곡동 보급부대 안에는 소총을 보관하기 위한 지하시설을 마련했다.

인천가족공원 입구에 ‘분산 창고’도 준비했다. 광복 후 반공포로수용소나 미군의 주둔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거의 120여 년간 부평은 군용지로 기획됐다. 현재 전하는 부평의 유산과 사건들은 대개 그 과정에서 등장했다.

부평을 재생하는 건 전쟁의 묵은 때를 씻어내는 일이다. 모든 유산이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일관된 역사 인식이 무엇보다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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