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천혜의 요새 삼랑성과 전등사(9)
전등사 무설전과 정족산 가궐지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 2012년 문을 연 전등사 무설전. 이 이름을 불국사에서 본 적 있다. 불국사의 무설전은 경전을 강의하는 공간인데, 무설(無說)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진리는 말로써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역설적 의미를 갖고 있다.

아마 염화미소(拈華微笑, 석가모니가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들어 보이자 팔만대중 중에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 지은 것)나 불립문자(不立文字, 말이나 글에 의하지 않고 진리를 깨닫는 것)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우리에게는 흔히 이심전심(以心傳心)과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알려져 있다.

강화도 전등사 무설전.
강화도 전등사 무설전.

현대식 법당인 무설전(無說殿)

전등사 무설전은 현대식 법당이라 해야 할 것 같다. 뒤에서 보면 지하층, 앞에서는 1층으로 돼있는데, 큰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앞면만 다듬은 사고석 크기의 자연석으로 담장을 쌓았고 사이사이 채광창을 만들었다.

무설전 상부에는 월송요라는 전등사 템플스테이 사무국과 방들이 있는데, 이를 두른 담장도 위에 놓여있어 마치 거대한 축대를 쌓은 것처럼 보여 그 안에 큰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전등사의 중요한 기도와 법회가 대부분 이곳에서 진행된다고 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복도식으로 된 회랑인데, 이곳이 미술관인 서운갤러리다. 김하림 화가의 ‘불의 춤’을 전시하고 있었다.

전등사 템플스테이 숙소인 월송요 마당.
전등사 템플스테이 숙소인 월송요 마당.

법당은 낮은 마루턱이 있어 신발을 벗고 올라갈 수 있다. 법당 안 불상도, 벽에 안치한 천불상도, 천장에 달아놓은 연등들도 일반 법당에서 보는 것들과는 판이하다. 모든 불상을 청동으로 만들어 하얀색 도료를 입혔는데, 특히 주존불과 협시보살상들이 조명을 받아 더욱 하얗게 빛을 발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마치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세상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언뜻 보기에 불상 5개가 일렬로 배치된 것 같지만 가운데 주존불인 석가모니불은 돔을 파고 그 안에 안치했다. 본존불은 석굴암의 본존불 형상을 본떴는지 매우 유사해 보인다.

그 뒤 벽면과 천장에는 탱화처럼 벽화를 그렸는데,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유행한 벽화 기법인 프레스코 기법(석회나 석고 등으로 만든 벽이 덜 마른 상태에서 수용성 물감으로 색을 칠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그래서인지 색이 밖으로 튀지 않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이런 효과 때문인지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이 더욱 입체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인다.

석가모니불 앞쪽에 안치된 협시보살상 네 개는 왼쪽부터 지옥으로 떨어지는 죽은 자의 영혼을 구제한 후에 스스로 부처가 될 것을 서원한 지장보살, 부처의 여러 가지 덕 중에서 이치와 명상과 실천을 관장하는 보현보살과 지식과 지혜와 깨달음을 관장하는 문수보살, 아미타불의 현신으로 구원을 요청하는 중생의 근기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나 대자비심을 베푼다는 관세음보살이 있다.

전등사 무설전 내부 법당과 불상들.
전등사 무설전 내부 법당과 불상들.

현대인의 인체 비례를 감안해 제작했다고 하는데 하얀색 도료를 입혀서인지 화려하게 보이지 않고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한다.

협시보살 뒤쪽 벽에는 좌대를 만들어 천불상을 빽빽하게 안치했다. 대승불교에서는 과거ㆍ현재ㆍ미래에 각각 부처 1000명이 있다고 보아 이들을 삼천불(三千佛)이라 일컫는데, 일반적으로 ‘천불’이라 하면 현재의 천불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형상화됐는데, 천불상 자체가 독립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모셔지기도 하지만, 다양한 종류의 본존상과 결합돼 불세계의 장엄이라는 부수적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적인 법당과 전시관을 겸한 복합 문화공간인 무설전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이런 공간이 매우 좋다. 탁 트인 강당 같은 법당, 위압적이고 화려하지 않은 불상들, 거기다 그림을 전시하는 공간 등이 어우러져 발길을 머물게 한다.

강화도 정족산 가궐지와 정족산성진지.
강화도 정족산 가궐지와 정족산성진지.

전등사 가궐지와 정족산성진지(鼎足山城陣地)

무설전을 나와 담장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 적묵당과 월송요 건물을 지나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산길이 시작되는 곳에 둔덕이 있는데 올라가면 3단 지형으로 이뤄진 평지들이 나타난다.

이곳이 고려 고종 46년(1259)에 지은 가궐지다. 고종이 신하들에게 왕조를 연장할 지기를 돋울 궁궐터를 묻자, 풍수를 업으로 하는 낭장 백승현이 삼랑성과 신니동을 건의해 가궐을 지었다.

원종 5년(1264)에 전등사에서 대불정오성도량(大佛頂五星道場, 나라의 온갖 재난을 물리치고자하는 큰 불교 행사)을 4개월간 열었는데, ‘고려사’에 원종이 직접 행차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대몽항쟁 39년 끝에 고려 조정은 개경으로 환도(1270)를 했고, 강화도에 남았던 고려의 문화유산은 몽골군에게 마구 불태워지거나 훼손되고 말았다. 이때 정족산 가궐도 폐허를 면치 못했다.

인천시 기념물 제66호인 정족산성진지는 정족산 사고(史庫)를 수호할 목적으로 정조 때 설치한 군사 주둔지 ‘정족진(鼎足鎭)’이 있던 곳이다. 정족진이 설치된 연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정조 8년(1784)에 정족진의 군창(軍倉)인 정족창(鼎足倉)이 건립된 기록으로 보아 그 근래에 설치됐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07년 방화로 전체가 소실돼 현재까지 공터로 남아있다.

동양고고학연구소가 1999년에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건물지, 청자, 기와 등 강도 시절 유적과 유물을 발견해 가궐지임을 확인했다. 건물 9개 동 터를 측량했으며,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강화도 지도’ 병풍 제1폭 정족산성진 일대와 대조해 건물 평면도와 겹치지 않은 구역의 대형 건물지 주춧돌은 정족산 가궐의 옛 터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2008년에 한울문화재연구원이 정족산성진지 발굴조사를 다시 했다. 건물지 11곳을 포함해 대규모 유구가 발굴됐다. ‘강화도 지도’에 나오는 진사(鎭舍)ㆍ내사(內舍)와 고종 8년(1871)에 설치한 무기와 군량을 저장하던 창고인 포량고(砲糧庫) 등의 터와 담장시설, 문지 등이 대부분 확인됐다. 또, 포량고 건물 바닥 전면에 벽돌을 깐 것으로 파악됐으며, 정족진 내부에서 전면 외부로 빗물 등을 빼내기 위한 배수구시설도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됐다.

시차를 대략 500여 년 두고 세워졌다 사라진 건물들의 터에 걸터앉아 이곳에 거주했을 사람들을 생각한다. 평상시에는 잘 느끼지 못하는 세상만물의 법칙인 성주괴멸(成住壞滅, 생성된 모든 것은 결국 티끌처럼 사라진다)이란 단어가 불현듯 떠오른다.

강화도 정족산 가궐지와 정족산성진지 건물 기단석과 주춧돌.
강화도 정족산 가궐지와 정족산성진지 건물 기단석과 주춧돌.

강화 의병 전투지, 전등사

정족산성진지 표지판 옆에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인 ‘강화 의병 전투지, 전등사’ 표지판이 서있다. 전등사는 1907년 7월 강화 진위대장 출신 이동휘가 김동수ㆍ허성경 등 기독교인을 비롯해 해산 군인 400여 명을 모아 합성친목회(合成親睦會)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반일 집회를 개최한 곳이다.

1908년에는 강화 출신 시위대 장교인 이능권(李能權)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 의병대에 해산 군인을 포함해 300여 명이 모여들어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陣)이라 하고, 친일파나 밀정 등을 처단하고 강화 전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렇게 강화도 의병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1908년 10월 일제는 용산 주둔 일본군 6사단 예하 13연대 정규 병력 70여 명을 강화에 투입했다. 10월 30일 일본군의 공세가 거셌지만 이능권 부대는 전등사 정족산성을 근거지로 해서 일본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다음날 기관총을 앞세운 일본군 2개 중대가 증파돼 의병대는 패배했다. 의병들은 강화도에서 나와 평산ㆍ연안ㆍ장단군 등지로 흩어져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정족산성과 전등사의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곳곳이 유물ㆍ유적이고 이야깃거리가 넘쳐난다. 사찰에 갔을 때 가장 궁금한 것은, 지금까지 설명한 사찰의 전각들이나 불상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스님들처럼 치열하게 정진하지는 못했지만 과연 진리는 존재하는 것인지, 진리의 실체와 깨달음이란 무엇인지, 나름대로 한 갑자 넘게 찾아봤지만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진리가 불변하는 것이라면, 태어난 것은 모두 죽는다는 것이 아닐지.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 아닐까?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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