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심혜진 시민기자ㅣ지난달 엄마가 이사를 했다. 어릴 땐 부모님을 따라, 결혼 후엔 남편 직장 따라 집을 수십 번 옮긴 엄마에게 이번 이사만큼은 의미가 남달랐다.

마흔 중반에 은행 대출로 얻은 첫 집. 엄마는 그 빚을 갚기 위해 남동공단에 있는 장난감 제조공장에 들어갔다. 이전까지 가족과 친구들은 엄마를 ‘옥자’로 불렀지만, 일터에선 ‘입분’으로 불렸다. ‘입분’은 주민등록증에 적힌 엄마의 ‘진짜 이름’이다.

“입분으로 살면서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지. 이 집이 복덩어리였던 거 같아.”

엄마에게 제 이름을 찾아준 집은 세월과 함께 낡아갔다. 일흔이 넘은 엄마에겐 기대고 의지할 단 하나의 쉼터이자 중년을 함께 보낸 동반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집을 떠나기로 한 뒤 엄마는 마음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했다.

짐을 정리하면서 빗물처럼 젖어오는 회한에 몇 번이나 한숨을 쉬어야했다. 이삿날, 이제 다시는 찾아갈 일 없는 빌라 3층을 올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짓던 엄마의 모습에 나도 코끝이 찡했다. 낯선 동네, 낯선 집에서 한동안 마음이 힘드실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이사 바로 다음 날부터 엄마의 음색이 점점 밝아졌다. 혹여 우울하실까 염려하며 전화 걸었던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새집에서 엄마의 마음을 훔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싱크대였다.

“먼저 살던 집은 싱크대가 너무 낮았어. 상추 씻으려면 허리 숙여야 되고, 설거지하면 옷이 다 젖었다니까. 이제는 허리를 숙일 필요가 없지. 아주 편해!”

가끔 엄마 집에 갈 때면 나 역시 유난히 낮은 싱크대가 몹시 불편했다. 그러면서도 그냥 지나쳤다. 24년 동안 한 번도 교체할 생각을 못했다니, 엄마도 나도 참 너무했다.

“그때는 크게 불편한 줄 몰랐어. 왜냐면, 그 이전에는 싱크대에서 일해본 적이 없으니까. 서서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거든. 높이가 맞는지 안 맞는지는 생각도 안 해봤지. 이후로는 그냥 익숙해진 거고.”

1996년 엄마가 집을 사기 전까지 우리 집엔 싱크대가 없었다. 내가 거쳐 온 부엌들의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부엌을 자주 드나들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부엌은 집마다 천차만별이었지. 옛날엔 나무를 때니까 부엌이 넓은 편이었어. 나무나 솔잎 같은 거를 부엌에 들여놨거든. 그땐 방하고 부엌이 일렬로 붙어있었어. 부엌 옆에 방, 그 옆에 방, 이렇게. 부엌은 맨 끝에 있었지. 바닥은 흙이었는데 늘 반들반들해. (흙먼지가 있는 게 아니고?) 응. 발로 밟아서 다져진 거지. 울퉁불퉁하긴 해. 그래도 흙먼지는 없었어. 하루에도 몇 번씩 빗자루로 쓸었어.

불이 나면 안 되니까 늘 깨끗하게 해야 해. 천장은 높고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지. 거미줄에 검은 매연 같은 게 잔뜩 붙어 있었어. 아주 지저분해. 어쩌다 한 번씩 빗자루로 대충 쓱쓱 하는데 그래도 안 없어져. 음식은 부뚜막에서 했어. 아궁이 옆에 흙으로 평평하게 단을 만들어놓은 거지, 솥을 걸어야하니까. 거기서 대충 음식 해 먹었어.”


좁고 낮은 단에서 허리를 굽혀 일하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 엄마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음식을 많이 안 해 먹었어. 여름에는 상추나 오이 씻어서 먹었고 겨울에는 맨 김치, 짠지였지. 국이나 좀 끓일까. 오일장 가서 생선이나 고기사 오면 그거 솥에다 쪄 먹고. 진짜 힘들었던 때는 결혼하고 나서 연탄아궁이 옆에서 밥하고 반찬 할 때였지.

늘 부엌이 좁았거든. 부엌에서 너희 목욕도 시켰는걸. 또, 부엌 바닥이 푹 꺼져 있어서 상을 차려서 방으로 갖고 들어가려면 꼭 계단을 올라가야했어. 국 넘칠까 살살 들고 가고 그랬지. 그때는 다 그렇게 사니까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불편했을 거 같아.”

싱크대.
싱크대.

# 낮은 부뚜막-깊은 부엌, 힘 많이 들고 칼로리 소모 심해

<우리 집은 부엌이 없습니다. ‘부엌이 없다니 참 이상한 집도 있다. 부엌 없는 집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셋방을 들었으니까요. 어머니께서는 참 불편하실 것입니다. 조그만 쪽마루에다 밥을 퍼서 놓고 무를 써실 때나 파를 써실 때에도 쪽마루에다 놓고 써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집 쪽마루는 다른 집 부뚜막과 같은 일을 합니다.(서울 동신국민학교 6학년 윤여정)

부뚜막에 앉아서 매일 보는 부엌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검정으로 시꺼멓게 된 벽에는 바가지가 걸려 있다. 천장도 벽과 마찬가지로 시꺼멓게 더러워져 있다.(서울 종암국민학교 제5학년 염준옥)> (조선일보 1959.10.11.)


부엌은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귀한 밥이 나오는 곳이었다. 한편으론 재와 그을음으로 더럽혀지기 쉽고 구석에서 쥐나 바퀴벌레가 나오기도 했다. 궁색한 부엌 풍경은 아이들의 눈에도 투명하게 비쳤다.

부엌을 개량해야한다는 주장은 1920년대에도 있었다. 한글학자 최현배는 ‘조선민족 갱생의 도’라는 글에서 부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부엌의 위치를 잘 선정하여 그을음이 집을 덜 그을게 하며 식당에 음식물을 나르기에 편리하도록 할 것, 아궁지를 개량하여 불 때는 데가 부엌 바닥보다 높게 할 것> (동아일보 1926.12.19.)

여성을 비하하는 ‘부엌데기’라는 표현도 옹색하고 지저분한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이란 뜻에서 나왔다.

<우리 가정에서는 여지껏 부엌에 대해서 아무런 중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보다도 오히려 부엌은 으레 더러운 곳으로 인정해 버려서 심지어는 깨끗지 못한 차림을 한 여자를 보고는 ‘부엌데기’라는 별명까지 붙이게 된 것입니다. (중략) 부엌은 으레 더러운 곳, 어두운 곳, 냄새 나는 곳이라고 처단해버릴 것이 아니라 가장 편리하도록, 가장 깨끗하도록, 가장 진보적으로 고쳐 꾸며나가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경향신문 1947.3.23.)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더러움보다 더 큰 문제는 방에 비해 부엌 바닥이 깊어 체력 소모가 많고, 조리대로 사용하는 부뚜막 높이가 낮아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일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우리 재래식 연탄아궁이 부엌 구조는 주부의 노동력을 불필요하게 소모시키는 요소가 많다. 실내 평면보다 훨씬 낮은 부엌 바닥은 오르내리는 주부의 다리 힘빼기에 알맞고 구부려야만 취사 준비가 가능한 부뚜막의 구조나 도구 배치 역시 한정된 면적 안에서 종종걸음을 치게 만든다.> (동아일보 1969.5.29)

대한가정학회는 1965년에 가사노동의 능률화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열량 소모량까지 구체적으로 계산한 내용이 눈에 띈다.

<부엌과 안방이 한국 재래식으로 부엌 바닥이 낮고 마루를 통해서 방으로 음식을 들여가는 집은, 부엌과 안방 바닥이 같은 높이로 직접 통로가 있는 집에 비해 에네르기 소모가 엄청나게 많다.

평지를 걸을 때는 1분에 2.46칼로리의 에네르기가 소모되나 부엌 계단과 문턱을 넘어서 오르내리는 데는 5.26칼로리가, 거기서 밥상까지 들고 오르내리려면 7.75칼로리가 소모된다. 이와 같은 에네르기의 소모를 알기 쉽게 거리로 환산해보면 재래식 부엌의 세 때 식사 준비는 개량식 부엌에서의 식사 준비에 비해 4km이상 더 걷는 셈이 된다.> (조선일보 1965.11.7.)


위 기사에는 낮은 부뚜막에 대한 실측 자료도 나온다.

<우리나라의 개수대나 조리대, 부뚜막은 낮아서 일하기에 여간 불편하지 않다. 우리 가정의 부뚜막 높이는 보통 40cm.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 신장을 156cm로 잡으면 가장 이상적인 높이는 78cm. (중략) 쪼그리고 앉아 일할 때는 1분당 2.8칼로리, 부뚜막 40cm 높이일 때는 2.5칼로리, 78cm의 높이의 조리대에서 일할 때는 1분당 1.8칼로리로 엄청난 차이가 보인다.>

요즘 일반적인 싱크대 높이는 85cm로 신장 160cm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40cm의 부뚜막이 85cm로 높아짐에 따라 가사노동자의 허리도 쭉 펴졌다.

아궁이와 부뚜막.
아궁이와 부뚜막.

# 동요 ‘꼬부랑 할머니’가 나온 이유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아궁이와 부뚜막 대신 입식 부엌을 가진 집들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막는 첫째 요건이 부엌 바닥 높이를 실내 마루 높이와 비슷하게 하는 작업이다. 말하자면 입식 부엌. 현재 도시에 새로 짓는 200여만원 이상의 집이나 아파트 부엌은 이 입식 부엌 구조를 갖고 있고 이미 재래식 부엌을 가진 집도 하나둘 부엌을 고쳐가고 있다. (중략)

우리나라에 스텐레스 싱크대가 선을 보이기는 7년 전. 좀처럼 관심을 못 끌다가 최근 들어 주부들의 발길이 잦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다섯 공장에서 매달 800대의 싱크대 조리대 등이 생산되고 중류 이상의 가정에 심심찮게 팔려간다고 업자는 말한다.> (동아일보 1969.5.29.)


1970년대엔 부엌을 개량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기사가 자주 등장했다. 당시 부엌 위층에 다락방을 만들어 부엌의 천장이 낮은 집이 많았다. 이에 다락을 없애고 부엌 바닥을 높이는 방법이 제시되기도 했다. 이즈음 허리를 굽힌 채 일하는 것이 주부들의 허리병을 키운다는 의학 정보도 흘러나왔다.

<우리 생활양식이 허리를 구부리고 다리는 접고 지내는 시간이 많아 30대만 되면 서서히 이상(=신경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가장 좋은 예가 재래식 부엌을 쓰는 주부들예요.” 힘은 힘대로 들고 늙어 허리병까지 얻는다. 입식 부엌을 쓰는 서양인들에게는 이런 현상이 적고 뼈 자체에 이상이 있는 경우가 많다.> (동아일보 1972.10.13)

엄마는 이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여자들은 늘 허리를 구부리고 일할 수밖에 없었어. 밖에선 쪼그리고 앉아서 밭일하지, 빨래도 하지, 부엌에서도 내내 허리를 못 펴잖아. 방에 들어오면 또 바느질하고. 밤에 잠자기 전까지는 등을 바닥에 댈 수가 없었어. 그래서 옛날 할머니들 허리가 기역 자로 꺾였나 봐. 할머니들은 무조건 지팡이를 짚었어. 오죽하면 ‘꼬부랑 할머니’라는 노래가 나왔겠어?”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 본격적으로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부엌 역시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싱크대와 가스레인지가 그 중심에 있었다. 1985년 입식 부엌 보급률은 대도시 18.3%, 중소도시 7.5%, 군 3.7%(조선일보 1986.5.30.)로 여전히 낮았다.

그러던 것이 1990년 52.4%로 전국 절반을 차지했고, 1995년에는 84.5%로 껑충 뛰었다.(매일경제 1996.7.18.) 그을음 가득하던 ‘부엌’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대리석이 얹힌 조리대와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오는 싱크대가 들어선 ‘주방’이 생활한 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 드디어 만난 ‘엄마 키에 맞는 싱크대’

“우리 집은 맨 꼴찌로 싱크대를 썼을 거야. (1996년에) 집 사면서부터 썼으니까. 그때 진짜 엄청 좋았어. (하수)물이 저절로 아래로 내려가지, 설거지 바가지(설거지할 그릇들을 담아 두던 바가지)도 필요 없지, 서서 일하니까 몸도 빨라지는 거 같더라고.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여기 이사 오니까 더 좋은 싱크대가 있네. 높이가 딱 맞아. 이럴 줄 몰랐어. 옛날 집 생각이 안 나.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지?”

며칠 전 엄마네 집에 가구를 조립해주러 갔다. 그날 엄마는 싱크대 앞에서 상추를 씻으며 신이 나 있었다. 얼른 핸드폰으로 뒷모습을 찍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엄마의 키는 나보다 1cm 컸다. 지금은 나보다 작다.

앞으로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순 없겠지만, 속도는 더뎠으면 좋겠다. 생의 마지막 집이라 여기며 들어온 집에서 엄마는 이제 막, 드디어 제 키에 맞는 싱크대를 만났으니까. 오래오래 이 행복을 누리시면 좋겠다.

※ 그동안 ‘이 물건, 언제 생겼지?’를 사랑해주신 독자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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