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문화재단-인천투데이 공동기획|
인천 시민문화활동 현장을 찾아서 ⑬
서해문화의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

<편집자 주> 인천문화재단은 인천을 기반으로 한 시민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시민문화활동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인천투데이는 인천문화재단과 협력해 이 지원 사업 공모에서 선정된 사업(단체) 13개의 취지와 의미, 활동 내용을 시민들과 공유하고자한다.

“어렵고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 우리의 ‘누이’들은 힘든 부모를 돕고 오빠와 남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학교가 아닌 공장에 가야 했다. 실밥과 먼지로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작업장에서 눈을 부비며 일해야 했다. 지금의 사회ㆍ경제적 여유는 이런 ‘누이’들의 희생과 무관하지 않다. (중략) 우리 ‘누이’들은 가족을 애틋하게 생각해 이런 선택을 했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저임금에 기초한 1970년대 수출주도형 경제체제에 묶여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비인격적 무시를 당하고 임금을 착취당하면서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소모적 인간으로 살아야했다. 온몸으로 사회 모순을 견디며 살았다. 이런 우리 ‘누이’들의 삶과 저항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이 있다. 인천 동구 만석동 37번지에 위치한 동일방직과 동구 화수1동 183번지에 위치한 인천도시산업선교회기념관이다.”

김도진 ‘미문의 일꾼교회(옛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목사가 기고해 <인천일보>에 실린 글 중 일부분이다.

9월 28일 열린 ‘어느 여성노동자에 대한 기록’ 집담회 장면.(사진제공ㆍ서해문화)
9월 28일 열린 ‘어느 여성노동자에 대한 기록’ 집담회 장면.(사진제공ㆍ서해문화)

누군가의 희생 잊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할 우리

인천의 역사는 노동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항기 부두 노동자부터 한국전쟁 이후 1970년대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도시의 공장 일자리를 찾아 많은 사람이 농촌을 떠나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1970년대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국내 최초로 여성 노동조합위원장을 선출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 나섰다. 그 과정에서 똥물을 뒤집어쓰기도 했고 알몸시위를 하기도 했다. 결국 1978년 조합원 124명이 ‘불순분자’와 ‘빨갱이’라는 누명을 덮어쓰고 직장에서 쫓겨났다.

1970년대 동일방직 회사 측이 뿌린 오물을 뒤집어쓴 여성노동자들.(사진제공ㆍ서해문화)
1970년대 동일방직 회사 측이 뿌린 오물을 뒤집어쓴 여성노동자들.(사진제공ㆍ서해문화)

이때부터 해고자들의 복직투쟁이 시작됐고, 해고자 124명 중 53명은 2001년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음으로써 명예를 회복했다. 그러나 이들의 복직 요구는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폐쇄돼있는 인천 동일방직엔 1950년대에 지은 의무실과 1960년대에 건립한 강당, 기숙사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이 어용노조의 방해와 독재정권의 탄압을 피해 몸을 숨긴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건물(현 ‘미문의 일꾼교회’)도 그대로 남아 있다.

동일방직에서 인천도시산업선교회까지, 여성노동자들이 숱하게 걸었을 이 길은 이제 한적하고 적막한 원도심의 흔한 거리가 됐지만, 이곳은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역사적 공간이다.

김도진 목사는 동일방직에서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 이르는 700여 미터 거리를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로 만들고 싶어 한다. 지금의 여유로운 일상과 평화가 어느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뤄졌음을 잊지 않고,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누군가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김도진 목사의 제안, 인천문화재단 지원사업으로 실행

과거 인천도시산업선교회였던 일꾼교회.(사진제공ㆍ서해문화)
과거 인천도시산업선교회였던 일꾼교회.(사진제공ㆍ서해문화)

김도진 목사의 제안을 사단법인 ‘서해문화’가 받아 실행하고 있다. 양진채(소설가) 동구 화도진문화원 사무국장이 김 목사의 이야기를 듣고 이 일을 ‘서해문화’에서 하자고 제안해 인천문화재단 시민문화활동지원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양 사무국장은 1980년대 일꾼교회 시절에 해고자로서 일꾼교회 건물 3층에 있던 해고자협의회를 드나들었다.

그는 “화도진문화원 사무국장으로 오면서 일꾼교회가 동구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봤다. 김 목사님을 찾아뵀는데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을 말씀해주셨다. 문화원에 있으니 같이 할 수 있는 사업을 찾아보겠다고 했다”며 “마침 인천문화재단 지원사업 공모가 떴다. 지방자치단체 보조금 지원을 받는 문화원은 자격이 안 되니 서해문화가 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해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서해문화가 중점을 둔 것은 ‘길’이었다. 동구에서 문화예술운동을 하는 ‘스페이스 빔’에서도 한국예술위원회 지원사업으로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이라는 테마로 강연회와 문화공연, 영화상영, 걷기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었다.

양 사무국장은 “동구에서 ‘산업과 노동’을 주제로 한 사업을 계속 벌여 이슈화해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동구에 있는 우리미술관(인천문화재단 운영)에서도 지난해 노동 관련 테마로 전시회를 했는데, 올해도 ‘산업과 노동’이라는 주제로 같이 해보자고 그곳 팀장에게 제안했다. 화도진문화원에선 ‘노동의 현장 공장의 불빛’이라는 제목으로 역사 강좌와 탐방을 진행한다”며 “민운기 스페이스 빔 대표와 만나 스페이스 빔은 강연회와 문화공연ㆍ영상상영을, 서해문화는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초청 집담회와 여성가요제를 하는 방식으로 업무를 분장했다. 길 탐방은 양쪽에서 시기가 겹치지 않게 했다”고 설명했다.

10월에 열린 ‘누구나 여성가요제’ 장면.(사진제공ㆍ서해문화)
10월에 열린 ‘누구나 여성가요제’ 장면.(사진제공ㆍ서해문화)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 이제 ‘똥물이 아닌 꽃’으로

서해문화는 9월 말에 이총각 전 동일방직노조 위원장과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초청해 집담회를 했다. 일꾼교회가 소장하고 있는 1970~80년대 사진 500장 정도를 스캔해 일부 사진을 스크린으로 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코로나19 감염 확산으로 40명 이내로 참여했다.

양 사무국장은 “‘제는 누구이고, 저 사람은 누구야’ ‘대부분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는데, 동일방직 노동환경은 열악했지만 청춘의 아가씨들이 모두 멋쟁이였지’ 등등, 생생한 이야기가 쏟아졌다”고 전했다.

이어서 10월엔 ‘누구나 여성가요제’를 미림극장에서 개최했다. 미림극장은 과거 노동자들과 달동네 사람들이 액션영화 등을 본 추억의 공간이다. 가요제 참가 신청을 받아 10개 팀이 무대에 올라 실력을 뽐냈다.

18세 고등학생부터 81세 노인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18세 학생은 트로트 ‘나이야 가라’를 불렀고, 고운 드레스 차림의 81세 노인은 ‘용두산 엘레지’라는 노래를 불렀다. 시장에서 일하다 온 옷차림으로 무대에 오른 74세 노인은 배호의 ‘누가 울어’를 불렀는데, 노래 솜씨가 대단했다. 

코로나19 때문에 관객은 20명 남짓이었지만, 흥과 감동이 어우러진 축제였다. 인천도시공사 후원으로 참가자 전원에게 선물을 주기도 했다.

11월엔 토요일마다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을 탐방했다. 장회숙 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 공동대표를 시작으로 이총각 전 위원장, 유동현 인천시립박물관 관장, 노동자 출신 이설야 시인이 인솔자(=해설사)로 나섰다.

폐쇄된 인천 동일방직 정문 앞에서 유동현 인천시립박물관 관장과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 탐방 참가자들.(사진제공ㆍ서해문화)
폐쇄된 인천 동일방직 정문 앞에서 유동현 인천시립박물관 관장과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 탐방 참가자들.(사진제공ㆍ서해문화)

동일방직에서 인천도시산업선교회까지 시작과 끝은 같아도 인솔자에 따라 조금 다른 길을 걸었고, 해설 내용도 달랐다.

장회숙 공동대표는 1920년대 제작된 옛 지도를 손에 들고 다니며 사라진 시설의 연혁과 역사를 알려주고, 이총각 전 위원장은 동네 우물터에서 빨래하던 사람들, 출퇴근길 골목골목 풍경 등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주는 식이었다. 매번 시민 15명 이내로 참여했는데, 연속해 참여한 이들도 있다.

보통 오전 10시께 출발하면 정오나 12시 30분께 일꾼교회에 도착했다. 도착하면 김도진 목사가 옛 사진들을 보여주며 얽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당초 김 목사가 연락되는 옛 여성노동자들을 일꾼교회로 부르면 탐방 참가자들이 그들에게 ‘똥물이 아닌 꽃’을 뿌려주게 하려고 꽃을 준비했는데, 대부분 연로하고 각자 사정으로 거의 나오지 못했다. 김 목사가 대신 받아 나중에 전달하는 것으로 했다.

노동 역사와 유산, 개발논리에 밀려나지 않기를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과 관련한 자료집도 만들었다.

양 사무국장이 정리한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투쟁사, 고제민 화가가 동구 만석동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들, 김성환 작가가 촬영한 만석동 일원 사진들, 이설야 시인이 쓴 시들이 담겼다.

원래 길 탐방 참가자들의 글이나 그림, 사진도 담으려했으나 코로나19 등으로 인해 일정이 늦춰지면서 담아낼 수 없었다. 아래는 이설야 시인이 쓴 ‘동일방직에 다니던 그 애는’라는 제목의 시 일부분이다.

‘하늘에 온통 붉은 눈발 내리던 날들이 지나고 / 빙판길에도 봄이 들어서는 / 꽃을 꽃이라고만 불러야하는 계절이 돌아와 / 내가 상고에 간신히 입학했을 때 / 그 애는 동일방직에 나갔지 / 낮에는 공장 다니고, 밤에는 산업체 야간학교 다니고 / 내가 밀린 납부금 때문에 복도에서 벌을 서고 있을 때 / 그 애는 여공이 되어 솜뭉치로 매일 가슴에 돋는 상처를 봉했네 / 커다란 기계 밑에서 나사못처럼 구부러지고 있었네 / 나사못이 된 그 애가 만든 실이 내 몸으로 감겨왔던가 // 나는 밤마다 영혼의 올이 하나둘 풀려 가느다란 실로 집을 지었네 / 전염병처럼 졸음이 오고 분홍 알약이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면 / 잠 대신에 악몽 속의 귀신들이 따라다니며 실을 풀어갔네 / 천사가 올 때까지만 다닌다던, 그 애’ (이하 생략)

동일방직에서 일꾼교회까지,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 탐방 참가자들이 길을 걷고 있다.
동일방직에서 일꾼교회까지,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 탐방 참가자들이 길을 걷고 있다.

양 국장은 “1970년대에 동일방직을 다녔던 여성노동자들이 이제 70~80대가 됐다”며 “당시 해고된 분들은 ‘단 하루라도 회사에 다시 들어가 명예롭게 퇴직하는 게 꿈’이라고 하신다”고 전했다.

이어 “김도진 목사님은 1970~80년대에 자신이 도시산업선교회에서 한 역할이 없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무슨 일을 하면 ‘그때 있지도 않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런 일을 해’라는 이야기를 들을 까봐 그동안 거의 활동하시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일꾼교회가 재개발구역에 포함돼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에 이곳저곳에 이야기하신다”며 “보전할 가치가 있는 역사와 유산이 개발논리에 밀려나가는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덧붙여 “코로나19 때문에 어려웠지만 최선을 다하기 위해 애를 썼다”며 “올해 사업 경험이 향후 다른 사업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며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 사업을 내년에 더 확대해 진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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