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천혜의 요새 삼랑성과 전등사 ⑦

전등사 삼성각.
전등사 삼성각.

전등사 삼성각(三聖閣)

대웅보전 옆 향로전과 약사전 사이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삼성각이 나온다. 1933년에 보인스님이 지은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인데, 정면이 가로로 길며 간결하면서도 깔끔한 느낌을 준다. 기단은 자연석 막돌로 허튼층쌓기를 했는데 약사전 기단과 마찬가지로 돌 사이 틈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삼화토를 발랐고, 정면에 장대석을 일렬로 놓아 계단처럼 밟고 올라가게 했다.

주춧돌은 자연석으로 놓아 그 위에 두리기둥(원기둥)을 세웠는데, 오른쪽 뒤 주춧돌은 원래 있던 큰 바위를 그대로 사용했다. 기둥 위에는 공포 없이 보아지(기둥 머리에 끼워 보의 짜임새를 보강하는 짧은 부재)와 대들보 끝만 노출해 깔끔하게 보인다. 창호는 전면으로 칸마다 쌍여닫이 세살문(띠살문, 상중하 세 부분에 띠살을 짜 넣은 문)을 달았다.

지붕 형태는 간단한 맞배지붕이지만 지붕 뼈대를 이루는 서까래는 부연을 달아 겹처마 형태를 취했으며, 처마 끝은 막새기와로 마감했다. 맞배지붕은 측면에 지붕면이 없기에 가능하면 용마루를 많이 빼서 비바람을 막고자했다. 그러다보니 자연 도리의 길이가 길어져 기둥ㆍ보와 함께 측면 나무들이 그대로 드러나 독특한 구조미를 보여준다.

삼성각은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 등 삼성(三聖) 세 분을 한 곳에 모셔놓은 곳으로, 따로 모셨을 때는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이라 부른다. 불교가 한국에 토착화하는 과정에 고유의 토속 신앙과 불교가 합쳐져 생긴 형태다. 삼성각 안에는 삼성을 각각 탱화로 그려 걸어놓았다.

전등사 삼성각 내부 칠성도.
전등사 삼성각 내부 칠성도.

가운데에는 ‘칠성도(치성광여래도)’가 걸려있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는 것으로 별나라의 주군(主君)으로 인간의 수명과 복을 담당하고 있다. 칠성도 중앙 상부에는 주존불인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별들의 황제인 북극성을 의미하는 부처님)가 손에 금륜을 들고 있고, 좌우에는 협시인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있다. 위로 왼쪽에는 북두칠성을 나타내는 칠여래와 오른쪽에는 도교의 상징인 칠월성군, 아래에는 별자리 28수를 상징하는 28부중(二十八部衆)인 호법신을 그렸다.

전등사 삼성각 내부 산신도.
전등사 삼성각 내부 산신도.

왼쪽에 걸린 ‘산신도’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가 그려져 있다. 산신은 우리나라 토속 신인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신으로 산신이라는 인격신과 화신인 호랑이로 나타난다. 흰 수염과 눈썹을 단 선풍도골의 노인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무속에서는 자식을 점지해주고 행운과 수명장수, 부를 관장하는 신령이다. 산신 신앙은 불경 안에서는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고 우리나라에서는 국가 제의로도 지냈다.

전등사 삼성각 내부 독성도.
전등사 삼성각 내부 독성도.

오른쪽 ‘독성도’에는 독성과 동자들이 그려져 있으며, 그 앞에 독성상도 안치했다. 독성은 나반존자(那般尊者)라고도 불리는데 천태산에서 십이인연을 홀로 깨달아 성인의 위치에 올라 말세의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한다. 천태산을 배경으로 옆 머리카락은 희고 눈썹이 긴 늙은 스님이 오른손에는 석장(錫杖)을 들고 가는 잎사귀로 만든 방석 위에 앉아 있다.

동자는 차를 다리거나 천도복숭아를 들고 있다. 나반존자를 부처님의 제자로 16나한(羅漢) 중 한 분인 빈도라바라타자(Pindolabharadvaja)로 보기도 하나, 불경에 그 이름이 나오지 않고 중국 불교에도 독성 신앙은 없다. 「환단고기」 ‘삼성기’에 보면 “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이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불교에서 우리의 고유 신앙인 나반을 수용하며 승려의 모습으로 바꾼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 토속 신앙과 관련돼서인지, 머리에 쌀을 인 할머니들이 대웅전보다 먼저 들르는 곳이 사찰의 가장 뒤에 배치된 삼성각이었다. 자식을 점지해주기를, 가족이 무병장수하기를, 재물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기를 기원하는 정성스런 마음과 익숙한 토속 신앙의 믿음이 이곳으로 발길을 향하게 한 것이리라.

전등사 극락암.
전등사 극락암.
굴뚝 형상 소각로 앞 석조지장보살상.
굴뚝 형상 소각로 앞 석조지장보살상.

보물 제393호 전등사 철종(鐵鍾)

삼성각에서 길을 따라 극락암까지 내려오면 굴뚝 형상을 한 소각로 앞 연화좌대 위에 석조지장보살을 새로 모셨다. 49제 때 망자의 옷을 태우는 명부전 바로 앞에 있는 소대(燒臺)가 관광객들에게 미관상 좋지 않아 이곳으로 옮긴 것 같다. 극락암은 비교적 근래에 세워졌다는데 문이 열려있어 계단을 올랐다가 스님이 안에서 일을 하고 있어 내부는 살펴보지 못했다.

극락암 계단 바로 옆에 종각이 있는데, 예전에는 우리의 종이 걸려있었다. 2004년에 종루에 있던 ‘전등사 철종’과 우리 종을 교체해 바꿔달았다. 이 종을 처음 보는 사람은 우리 종과 너무 다른 모습과 보물 제393호라는 것에 두 번 놀란다. 이 종은 우리나라 종이 아닌 중국 종이기 때문이다.

종각으로 옮겨진 철종.
종각으로 옮겨진 철종.

이 종의 형태를 보면, 우리나라 종과는 달리 종을 매다는 용뉴(龍鈕) 부분은 용 두 마리가 서로 등지고 웅크려 종의 고리를 이루고 있고, 우리나라 동종에서 보이는 소리가 나오는 관인 음통은 없다. 용두(龍頭) 주변에는 아름다운 연꽃 16개가 복잡하게 둘러져 있는데 연꽃잎과 연꽃잎 사이에도 연꽃잎의 끝이 새겨져 있어 마치 꽃잎이 겹쳐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아래에 넓은 가로 띠 두 줄을 돌리고 위에는 뾰쪽 솟은 꽃잎 9개를 돌아가면서 배치했고, 아래에는 8괘가 나열돼있다.

몸통은 가로 띠 여러 줄로 위아래를 크게 구분했는데, 각각 사각형 구획 8개를 마련했다. 사각형 사이에도 줄을 세로로 새겼다. 이 사각형 안과 세로 줄 사이에 명문이 쓰여 있다. 시주한 사람과 공사 감독자, 장인 등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중 ‘大宋懷州修武縣 百巖山崇明寺 紹聖丁丑歲 丙戌念三日鑄 鐘一顆(대송회주수무현 백암산숭명사 소성정축세 병술염삼일주 종일과)’라는 명문이 있어, 중국 하남성(河南省) 회경부 수무현에 있는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종을 만든 연대가 북송의 철종 소성 4년, 즉 1097년(고려 숙종 2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구(鐘口)는 넓게 띠를 둘러 물결모양을 해 중국 종의 특성을 잘 드러냈다. 바로 그 위 물결이 낮아지는 곳에 종을 치는 곳인 당좌(撞座)를 4개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중국 종은 그 모양새를 보아도 꾸밈이 없고 큰 무늬를 사용했다. 땅 덩어리가 큰 만큼 웅대함을 중요시하기 때문인지, 장중하다는 느낌이다.

이 종이 어떻게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전해졌는지 정확한 경로는 알 수 없으나, 일제 말기 군수물자를 확보하려고 금속류 등을 강제 수탈할 때 숭명사에서 빼앗아 부평 조병창(현 부평미군기지)에 보관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광복 후 부평 조병창에서 이를 발견한 불자가 전등사 역시 종을 공출당해 없었으므로 이를 전등사로 옮긴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에 중국 유물이 들어와 보물로 지정돼있으니 신기하다. 학술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것이기에 중국종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 보물로 지정된 것이란다. 철로 만든 종이지만 종소리가 청아하다. 중국 북송 시대에 만들어진 명문을 지니고 있어 중국 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우리나라 범종과 비교할 수 있어 가치가 크다고 한다.

죽은 나무 밑동에 누군가 보리달마를 조각해놓았다.
죽은 나무 밑동에 누군가 보리달마를 조각해놓았다.

종각 앞에는 줄기가 부러져 죽은 나무가 있는데, 누군가 나무 밑동에 중국 선종(禪宗)의 제1대 조사인 보리달마를 조각해놓았다. 달마도를 걸어놓으면 액운을 막아주고 복을 가져온다고 한다.

일종의 부적 역할을 한다는 것인데, 남을 해치지 않는다면 뭘 믿건 상관없으나 과연 달마대사가 이런 광경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달마대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 씨앗을 심었고, 그것이 자라 동아시아 특히 우리나라에서 선불교라는 나무로 성장했다. 이런 시각에서 달마의 조각을 바라봤으면 한다.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