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던 날(THE DAY I DIED : UNCLOSED CASE)│박지완 감독│2020년 개봉

인천투데이=이영주 시민기자│병가 후 복귀를 준비하고 있는 형사 현수(김혜수)는 자살로 추정되는 실종 사건의 종결 보고서 작성 임무를 받고 섬으로 간다. 실종자인 세진(노정의)은 아버지가 연루된 범죄의 증인으로 지목돼 수사기관의 보호를 받으며 서울을 떠나 반 년 정도 섬에서 격리돼 지내던 고등학생. 태풍이 몰아치던 날 바닷가 절벽에서 사라졌다.

절벽에 남아 있던 세진의 신발과 겉옷, 세진이 사용하던 책상 위 유서는 이 실종 사건이 자살이라는 완벽한 증거로 보인다. 현수가 맡은 임무는 수사 기록과 세진의 자살에 힘을 실을 섬 주민들의 증언을 덧붙여 보고서만 작성하면 되는, 어쩌면 단순한 업무다.

섬 주민들을 만나고 세진이 지내던 공간을 살피며 CCTV를 비롯한 사건기록을 꼼꼼히 검토할수록 현수는 이 사건이 단순 실종 사건이 아니라고 의심한다. 세진이 의지하고 따랐던 새엄마 정미(문정희)도, 이 사건을 맡았던 형사 형준(이상엽)도 모두 의심스럽다. 누구보다 세진이 섬에서 머물던 집의 주인이던, 모종의 사고로 말을 할 수 없게 된 순천댁(이정은)은 말은 못하지만 사건 이면의 진실을 알고 있는 듯하다.

2008년 서울 국제여성영화제 아시아 단편 경선에서 대상을 받은 ‘여고생이다’를 연출한 박지완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 ‘내가 죽던 날’은 장르를 규정하기 쉽지 않은 영화다. 물론 시놉시스도 그렇고 초반부 장면들은 형사가 자살로 보이는 소녀의 실종 사건을 쫓는 미스터리 스릴러로 보인다. 모두 자살일 것이라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하는 사건이 있고, 형사 현수의 시점에서 사건이 남긴 균열을 보여주며 뭔가 다른 진실이 숨어 있을 거라는 암시(떡밥)를 내비친다.

그러나 영화는 스릴러 장르라면 으레 따라오는 결말인 떡밥 회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세진의 흔적을 쫓으며 현수는 가장 가까운 이의 배신과 예상치 못한 사고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통째로 부정당한 자신과, 자신의 잘못도 아닌 아버지의 범죄 때문에 섬에 고립 된 세진을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CCTV에 남아 있는 세진의 절망과 분노어린 얼굴에서 자신을 본다. 현수가 세진을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영화는 스릴러에서 여자들의 생존기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말을 하지 못하니 더욱 비밀이 많아 보이는 목격자 순천댁의 눈빛은 스릴러다운 의심보다는 말하지 않아도 직감할 수 있는, 삶의 아픔을 간직한 생존자들의 연대감을 느끼게 한다. 아… ‘내가 죽던 날’은 세진, 현수, 순천댁을 통해 여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 투쟁을 위한 연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였구나.

얼마나 많은 여자가 자신의 탓이 아닌 일에 죄책감과 좌절을 느끼며 스러져갔던가. 영화를 보며 구하라와 설리를 떠올렸고, 현수와 세진처럼 왜 이렇게 된 건지 까맣게 몰랐다는 자책으로 세상을 향해 겨눠야할 칼끝을 자신에게 돌려야했던 숱한 여자들을 생각하며 통곡했다.

그러나 “다시는 그 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현수의 대사이자 여성주의 연구자 권김현영의 책 제목) 끝내 살아낼 것이다. 믿었던 이들마저 등을 돌렸더라도 살아야할 이유는 분명히 있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순천댁의 대사) “우리는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권김현영의 책 제목)이고, 당장의 승리가 아니더라도 “싸웠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싸울 것이다.”(현수의 대사)

그 싸움은 혼자가 아니다. 어린 나이에 벼랑 끝에 내몰린 여고생의 극한 절망을 연기한 신예 노정의에게 관록의 탑배우 김혜수와 이정은은 말이 아닌 눈빛만으로도 강렬한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세대를 넘나드는 배우들의 연기 호흡은, 상처투성이이지만 우리는 연결돼있다는 것을, 서로 강력한 지지자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무엇보다 ‘여고생이다’ 이후 10여 년을 끝내 ‘살아남아’ 이렇게 멋진 장편영화로 찾아와준 박지완 감독이 그저 반갑고 고맙다. ‘내가 죽던 날’은 우리가, 내가, 끝내 살아남아야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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