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철 참여예산센터 소장

최계철 참여예산센터 소장
최계철 참여예산센터 소장

인천투데이ㅣ역사는 과거를 돌아보는 거울이며 미래의 교훈이 되는 지침서다. 역사를 존중하고 두려워하는 통치자가 진정한 통치자다.

실체와 근원지가 정확한 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은 국왕이 승하하면 다음 즉위하는 왕이 이전 왕대의 잘못을 기혹(欺惑: 속여서 홀리게 함)한 기록이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 이긴 자의 기록이라 하는데, 이 방대한 역사를 기록하는 업무를 맡은 사람들은 유교사관으로 무장된 사관이었다.

이들은 현재의 사무관이나 주사 이하의 하위직이었다. 사관은 특별히 청렴이 요구되는 직위로, 그 선발에 신중을 기했다. 예문관의 사관과 겸사관을 포함한 60여명의 사관은 숙직하며 직필위주에 입각해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일 기록했다.

이들이 쓴 왕실 내부의 일과 조정의 모든 행사, 소문 등의 초고(草稿)가 사초(史草)이다. 만약 사초를 일부러 없애거나 고치거나 훔쳤을 경우나 내용을 누설했을 때는 참형에 처했다.

그때그때 정치의 득실과 인물의 선악, 조정의 모든 일을 보고 듣는 대로 적은 사실이기에 왕도 볼 수 없는 극비 문서였다. 세종도 기록을 보지 못했고, 시퍼런 권력의 연산군도 일부 발췌분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사관들은 두 부를 작성해 각자 비밀리에 관리하고 있다가 임금이 죽은 후에 실록을 만들기 위해 설치되는 실록청(나중에 춘추관)에 한 부를 제출했다.

실록은 초초(初草), 중초(中草), 정초(正草) 3단계를 거쳐 만들어지는데, 정초본을 활자로 인쇄해 이른바 위작을 방지하기 위해 네 부 또는 다섯 부만을 만들어 사고에 각각 보관했다. 초초본과 중초본은 세검정 밖 차일암 냇물에 먹 글씨를 풀어 너럭바위에 종이를 말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 ‘조선왕조실록’이다. 472년간의 기록을 1893권 888책에 담았다. 1993년에 이르러 학자 3000명이 25년간 한글로 번역했는데, 200자 원고지로 높이가 63층 빌딩의 세배나 됐다. 하루에 100페이지를 읽는다면 4년 3개월이나 걸리는 방대한 양이다.

사관은 역사의 사실을 기록할 뿐 아니라 대상자들의 행태를 유교적 명분과 가치 기준에 따라 신랄하게 비판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왕들과 대신들이 권력 남용을 자제하고 유교적인 가치 기준에 따라 정국을 운영하고자했던 것은 하위직에 불과한 사관들의 눈과 손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어느 왕이 자신의 모든 것이 모조리 기록돼 후세에 전해진다는 사실에 초연할 수 있었을까? 왕은 자신의 허물이 역사에 남을까 두려워 가급적 사관을 배척했을 것이고, 사관은 사관대로 역사를 바로 기록하기위해 왕의 곁에 가야만 했을 것이다.

물론 실록청이나 춘추관 책임자를 제 멋대로 임명해 선왕의 기록을 필삭하고 자신에 대한 기록이 궁금해 훔쳐보거나 불리한 기록을 위조해 재작성하기도 했을 것이다. 또, 사초를 아예 무덤으로 가져하거나 불태워버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피란하는 왕의 행렬에도 사초를 짊어진 사관들이 있었다.

무오사화 시 김일손 같은 사관은 왕의 문초와 죽임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조선왕조가 500년간 무너지지 않았던 까닭은 죽음 앞에서도 정의를 지키려한 사관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권력의 회유와 압박 속에서도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한다는 조선의 사관 정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송곳날보다 꼿꼿했던 그 사관들의 후배들은 지금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인가.

남을 밟아서라도 올라야하고 모든 연(緣)을 엮고 꿰어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성공이라 여기는 세상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고 사모하는 게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자의 자기변명인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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