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종필 감독│2020년 개봉

인천투데이=이영주 시민기자 | 
1995년, 한국의 잘 나가는 대기업에 다니는 자영(고아성)과 유나(이솜), 보람(박혜수)은 고등학교 때 전교 1ㆍ2등 하던 똑똑한 여자들이다. 입사한 지 8년차라 어지간한 과장ㆍ부장보다 일처리도 능수능란하지만 그녀들에게 맡겨진 일은 뒷수발. 사무실 청소는 기본에 문서 수발, 커피 수발, 하다하다 구두닦이 수발까지 한다. 단지 고졸 여사원이라는 이유로.

나중에 입사한 대졸 사원들이 대리를 다는 동안에도 그녀들은 만년 평사원이다. TV에 나오는 멋진 커리어우먼을 꿈꾸며 입사한 이 회사에서, 마치 신분 표시라도 하듯 다른 직원들이 안 입는 치마 유니폼을 입어야하는 그녀들에게 과연 미래가 있을까?

마치 사회 고발 영화인 것 같은 암울한 설정이지만 이종필 감독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디테일하면서도 경쾌한 리듬의 연출과 배우들의 찰떡같은 연기로 만든 통쾌한 히어로 영화다. 이 영화의 히어로는 영화 제목인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토익 600점을 넘으면 고졸 여사원도 대리 승진이 가능하다는 새로운 사규 덕에 고졸 여사원들이 아침마다 영어를 공부하는 모임이다.

지방의 공장으로 외근을 갔다가 공장 폐수를 무단 방류하는 현장을 목격한 자영은 함께 외근을 나갔던 최동수 대리(조현철)를 통해 상황을 보고한다. 회사는 곧바로 조사에 착수하지만 결과는 기준치보다 낮은 페놀 수치. 결과지를 들고 공장 주변 주민들에게서 합의서 서명을 받던 자영은 친한 친구인 유나, 보람과 함께 증거들을 모으고 짜 맞추며 회사가 감춘 비밀을 밝혀낸다.

삼진그룹의 페놀 방류는 비단 공장 폐수 방류라는 사내 비리에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한국기업을 통째로 먹어 삼키려는 글로벌 투기자본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자영, 유나, 보람은 아침마다 함께 영어 공부를 하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고졸 여사원들과 힘을 합쳐 글로벌 자본에게 넘어가기 직전인 회사를 구해낸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비단 토익 600점이 아니라, 회사를 구하고 진정한 영웅이 된다.

평범한 사람들, 오히려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던 고졸 여사원들이 자신이 겪는 부당함과 싸우는 것을 넘어 회사를(세상을) 구한다는 설정은 글로만 읽으면 다소 황당하고 과장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주인공인 자영, 유나, 보람의 개성 강하고 분명한 캐릭터는 암울한 현실을 뚫고 나갈 만큼 강력하다. 성실한 탐문과 조사는 생산관리3부 자영이, 빠르고 정확한 자료 분석은 올림피아드 출신 수학 천재 회계팀 보람이, 싸움의 전략을 짜고 함께 싸울 사람들을 조직하는 건 마케팅팀 아이디어뱅크 유나가 하는 게 애초부터 당연해 보인다. 설득이 된다.

폐수 유출에서 글로벌 투기자본의 회사 매입 음모로 사건이 확장되면서 히어로가 세 명의 주인공에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전체로 확장되는 과정은 영화 초반 고졸 여사원들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과 겹치며 통쾌함을 배가한다. 이렇게 통쾌한 승리담을 본 게 언제였던가. 오랜만에 만난 상큼한 히어로 영화다.

그런데 이상하다. 극장을 나오는데 울컥, 눈물이 난다. 슬픔이 몰려온다. 통쾌한 히어로 영화를 보고 나서, 그것도 영화가 다 끝나고 갑자기 눈물이 나다니 처음 겪는 일이다.

그렇지. 이 영화의 배경은 1995년. IMF 구제금융 위기가 오기 직전이다. 자영과 유나와 보람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그녀들이 지켜낸 그 회사가 몇 년 뒤 어떻게 될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영화에서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때문에 실패했던 글로벌 자본의 베어허그(Bear Hug)는 결국 성공한다는 사실을, 간신히 토익 600점을 넘겨 대리로 승진했을 그녀들이 이후 어떤 식으로 회사에서 내쳐질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국 비정규직 마트 캐셔가 됐으려나? 그마저도 자동화로 기계에 밀려 해고됐으려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그녀들은 지금 모두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후’를 알고 보는 승리담은 너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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