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 커트 보니것 지음 | 정영목 번역 | 문학동네 출판

인천투데이=이권우 도서평론가 |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의 감흥이 떠올랐다. 무척 대중적인 필치이지만, 그 밑에 흐르는 문제의식이 만만찮았다. 그러나 그 작가의 작품은 드문드문 소개됐고, 흔히 말하는 뛰어난 번역자의 손을 거치지도 않았고 유명한 출판사에서 내지도 않았다.

나도 우연찮게 읽고 좋아한 작가라, 책 좋아하는 주변사람에게 말해도 잘 모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럴 때는 겸손하면 안 된다. 왜 좋은지 더 찬양일색으로 떠벌여야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법이다.

그러다 기회가 돼 그의 작품을 다시 읽었는데, 이번에는 세계문학전집에 당당히 들어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국내에서도 인정받게 됐구나 싶어, 기분이 좋았다. 번역자도 정평 있는 분이 맡았다.

그냥 서재를 뒤적여 옛날 책을 읽어볼까 하다 굳이 새 책을 사서 보았다. 이제는 제법 알려진 작가인지 리커버판도 나왔다. 한 작가가 다른 나라의 독서시장에 자리 잡기가 이처럼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겼다.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 제목만 보면, 범죄를 주제로 다룬 소설일 법하다. 하지만 알고 보면 대단히 빼어난 반전(反戰) 소설이다. 이야기인즉슨, 군종사병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빌리는 독일군의 대공세에 포로가 되고 만다. 포로가 되는 과정도 재미있다.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다 그냥 죽어버리고 싶었으나, 여차저차해서 포로가 됐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특유의 허무주의적이고 블랙유머적인 문장을 적절하게 배치해 읽는 이를 즐겁게, 때로는 긴장하게 한다. 빌리는 고생 끝에 영국 출신 포로와 합류했는데, 나중에는 미군만 따로 드레스덴으로 가게 된다. 노역에 동원된 것이다. 영국군은 드레스덴으로 가는 미군을 부러워한다. 포로수용소보다는 나을 거라 여겨서다. 과연 그렇게 됐을까?

드레스덴은 군사지역이 아니다. 무기 공장도 없고 군부대도 없는, 그야말로 문화 도시다. 숱한 공습에도 연합군이 드레스덴을 폭격하지 않은 이유다. 미군 포로는 전쟁 전에 도살장으로 쓰던 곳에 수용됐다.

그 도살장에 간판이 붙었는데, ‘5’라는 숫자가 있었다. 그래서 작품 제목이 제5도살장이다. 풀어쓰면 드레스덴 미군 전용 포로수용소가 되겠다. 그런데 흥미로운 대목은 소설이 시간 순으로 쓰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고, 현실과 환상이 섞여 있다. 낙오자가 돼 도망 다닐 때와 비행기 추락 사고를 겪으면서 현실적 시간 개념이 무너지고, 과학 소설적 요소가 섞여 외계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문제는 드레스덴 폭격의 참상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고한 민간인이 히로시마보다 무려 두 배 이상 죽었다. 모두 입을 다물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고, 전쟁 전체에 영향을 끼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독일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드레스덴에 무차별 폭격을 했을까.

흔히 연합군은 선이고, 나치는 악이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선한 연합군이 무고한 독일시민을 학살한 것은 어떻게 평가해야하는가? 이 사건으로 나치가 선이 됐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연합군이 늘 선이냐고 물어보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이 작품이 발표되자 베트남전쟁 반대를 외치던 미국 청년들이 열렬히 환영했을 수밖에. 모든 전쟁은 아이러니하다. 선의 가치를 내세우지만, 결국 악을 저지르고 만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어가 아이러니하다.

드레스덴 폭격 이후 미군이 동원돼 수습에 나섰는데, 에드거 더비라는 포로가 폐허에서 찻주전자를 가져왔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했다. 말이 되는가? 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그게 바로 전쟁이라고 커트 보니것은 말하는 셈이다.

아마도 이 작품이 국내에 수용되는 과정이 길었던 데는 형식의 파격성, 다양한 실험적 요소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에는 바로 그 요소가 독자에게 익숙해져 많은 팬을 거닐게 됐을 터다.

다시 읽으며 피터 브뤼겔의 작품 ‘이카루스의 추락’이 떠올랐다. 이카루스가 추락하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무심함을 그린 작품이다. 그 무심함이 주는 미적 충격이 있다. 제5도살장의 아이러니는 그 충격을 겨냥한 작품이다. 다시 읽어도 좋은 작품은 흔하지 않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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