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심혜진 시민기자ㅣ엄마는 25년째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생애 처음 월세에서 벗어나 ‘내 집 마련’이란 오랜 꿈을 이룬 곳이다. 결혼 후 열여덟 번이나 이어진 이사도 그 집에서 멈췄다.

이사라면 지긋지긋하다던 엄마가 최근 집을 옮기기로 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빌라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나이가 더 들면 출입이 불편해질 수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다섯 식구가 복닥거리며 살던 집은 혼자 살기엔 너무 넓고 휑했다. 새집과 주변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어차피 갈 거라면 하루라도 젊을 때 가자는 생각도 했다고 했다.

이사 관련 이미지.(출처 아이클릭아트)
이사 관련 이미지.(출처 아이클릭아트)

집을 내놓고 연락이 오길 1년을 기다렸다. 그러다 한 달 전, 갑자기 매입자가 나타났으니 이제 살 집을 구해야했다. 다행히 소형 아파트 매물이 꽤 나와 있었다. 공인중개사 이야기론 정부의 1가구 1주택 정책 발표 이후 세금을 걱정한 임대인들이 너도나도 집을 내놓았다고 한다.

엄마는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애착이 무척 강했다. 집을 떠나는 소회가 남다를 것 같았다.

“덤덤하네. 안 믿어져. 아직 (이 집에) 정이 있어. 여기서 제일 오래 살았잖아. 나중에 치매 걸리면 이 집으로 올 거 같아. 처음에 이사 올 때 여기서 뿌리내릴 거라고 그랬거든. 그런데 또 이사를 가니까 영원이라는 건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해.”

엄마는 반포장 이사를 택해 그릇과 옷가지 등 세간을 손수 정리해야한다. 이사는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필수물품만 빼곤 웬만한 짐은 벌써 종이상자에 다 담겼다.

“요즘은 포장만 해놓으면 다 갖다 놔주니까 편하지. 옛날에는 상자나 이런 게 없으니까 보자기나 이불보 같은 걸로 이사를 했지. ‘다우다’라고 나일론으로 된 보자기 같은 거. 거기다 이불이랑 옷도 넣어서 싸고. 짐이라고 해야 주로 솥단지, 그릇, 이불이었어. 옷은 별로 없었고.

가구는 장롱, 쌀통, 머릿장(머리맡에 두고 손쉽게 사용하는 소품 등을 넣어두는 장) 같은 거지 뭐. 짐은 지게로 지거나 리어카에 싣고 가지. 여섯 살쯤에 좀 멀리 이사를 갔는데 큰 짐은 기차 수하물로 부쳤어. 전용 기차가 있어. 맡길 때 표를 줘. 그걸 가지고 마차를 끌고 가서 찾아오는 거야.

(이사를 자주 다녔는지?) 그때는 먹고 사느라 이사를 다닌 거 같아. 늬 할아버지가 어디 가서 밭 일궈서 농사 지어먹겠다고, 또 어디 과수원에 일하러 가고. 오빠들이 세어 보더니 예순여섯 번을 이사했대. 그냥 동네로, 근처로 가는 거지.

결혼한 담에도 똑같아. 늬 아빠가 취직을 못하니까, 말하자면 일용직으로 일하니까. (학력이 없어서?) 그렇지. 초등학교 나와서는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까 누가 어디에 일자리 있다고 알려주면 이사를 가는 거지.”


# 아파트가 바꾼 것들

‘낯모를 사람들이 울렁줄렁이 이삿짐 지고 이골길을 갑니다. 어린 딸을 짐 실은 지게 위에다 높다랗게 둥-실 지고 갑니다. / 먼 길에 다리 아픈 이삿꾼들이 집행이(지팡이) 짚고짚고 길을 갑니다. 무거운 누더기 짐 머리에 이고 강아지를 안고서 지나갑니다.’(동시 ‘이사꾼’ 김유안 1930.10.29. 조선일보)

새로운 삶터로 떠나는 한 무리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는 동시다. 고되더라도 직접 짐을 이고 지고, 때론 소가 끄는 마차나 손수레, 자전거로 끌고 가는 것이 그나마 세간을 지키는 좋은 방법이었다. 이삿짐을 옮기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심심찮게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사 관련 이미지.(출처 아이클릭아트)
이사 관련 이미지.(출처 아이클릭아트)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산업화와 도시화로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미국 잉여농산물 수입과 고리대 수탈 등의 영향으로 농업이 어려워진 탓도 있었다. 머나먼 도시로 이주를 선택한 이들은 기차와 배로 이삿짐을 날랐다.

‘서울 영등포역 화물계에서 화물주인 남성현(38. 흑석동산79) 씨는 전날 전주에서 탁송한 이삿짐 중 시가 6만5000원 상당의 의류 13킬로가 도난당한 것을 발견. 철도청은 이 화물 도난 사고가 화차 안에서 났는지 역에서 났는지를 조사 중이다. 그런데 화주 남 씨에 의하면 지난 15일 전주역에서 대화물로 탁송한 것 중 캐비니트 속의 짐과 트렁크 속의 옷이 없어졌다는 것.’ (1965.12.21. 경향신문)

‘대화물 취급소에서 지시한 대로 몇 번씩이나 잘 포장한 이삿짐 속에 든 선풍기, 카메라, 양복천, 옷가지 등이 서울에서 광주까지 가는 사이에 감쪽같이 없어져서 어리둥절했다. (중략) 내가 화주가 아니고 짐을 부친 사람이라서 더욱 입장은 난처했다. 매형이 광주 은행지점장으로 전근했기 때문에 심부름을 했기 때문이다.’ (1969.4.11. 동아일보)

이삿짐센터는 1964년 화물 운송회사였던 ‘대한통운’에서 맨 처음 선을 보였다. 당시 이삿짐센터는 바퀴가 세 개인 삼륜차로 짐을 옮기고 삯을 받았다. 1967년 1월, 정부가 고속도로 건설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들에게 대운의 시기가 찾아왔다. 고속도로가 지나는 지역의 땅값이 폭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도드라진 곳은 서울 강남지구였다.

‘상가라고 하지만 시골 장터에 불과하고 사실상 주거지역인 말죽거리는 강남지구 중에서 현재 가장 높은 땅값을 형성, 평당 3만 원 꼴을 호가하고 있다.’ (1968.2.17. 매일경제)

집을 투기의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도로와 아파트가 생기는 도시로 이사하려는 인구는 점점 늘어났다.

‘부동산 투자가 활발해지고 새로 짓는 집이 늘어감에 따라 이사가 한창이었다. 김장철을 앞두고 겨울을 정착하기 위한 것. 대한통운의 작업량이 작년보다 20%나 늘었고 이삿짐센터가 곳곳에 생겨나거나 삼륜차 주차장이 변두리에까지 뻗친 것은 이를 증명하는 것. 이들의 말을 빌면 지난 늦여름에는 작년보다 20~30% 늘었다는 게 공통되고 있다.’ (1969.11.15. 동아일보)

전국에 이삿짐센터가 우후죽순 생기면서 ‘2424’라는 전화번호 뒷자리를 선점하려는 눈치싸움도 치열했다. 그러나 서비스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지 않아 횡포가 심했고, 고객과 갈등이 잦았다.

‘요란하고 친절한 광고문과는 달리 서비스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중략)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길엔 20m당 100원씩 더 받는다. 약삭빠른 상혼은 이곳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아파트 급증으로 2층 이상 올라가는 아파트의 이사족들이 늘자 각 이삿짐센터에서는 1층마다 400원 정도 가산해 받는다. (중략) 이밖에 냉장고 등 사치품에는 특별 서비스 요금이 더 붙는 상혼.’ (1971.3.6.경향신문)

층수가 올라갈 때마다 비용을 더 받은 것은 당시 아파트엔 화물을 실을 수 있는 승강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층으로 짐을 옮길 때 사용한 것은 실외 승강기의 일종인 곤돌라였다. 옥상에 곤돌라를 설치하고 줄을 연결해 유리를 닦거나 짐을 오르내리게 하는 장치였다.

그런데 곤돌라는 사고가 잦았다. 옮기는 도중 이삿짐이 파손되거나 조작을 잘못해 추락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1979년 12월, 아파트에 사람용 엘리베이터 이외에 각종 화물을 운반할 수 있는 화물 전용 엘리베이터 설치 의무화 방침을 세운다고 발표했다. 한편, 아파트의 곤돌라가 임종 문화를 바꾸고 있다는 내용의 글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한양대학교 국학연구소 소장이 쓴 글이다.

‘늙어서 입원해서 치료하다가 가망이 없으면 자손들이 집으로 모셔가서 집에서 와석종신케 하는 게 우리의 관습이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죽으면 관이 기중기로 스카이다이빙은 아니지만 공중걸이로 지하로 내려놓게 되니 야단이다. 그래서 자손이 늙은 부모가 위중하면 미리 아파트에서 병원으로 옮겨 응급실에서 임종케 하고 시체실에 넣어 얼어버리게 한다. (중략) 그 아파트 지붕 끝에 ‘하늘소’란 곤충의 이빨 같은 두 개의 기중기 대가리가 밖으로 튀어나와 보이는데 저것이 이삿짐을 나르긴 하지만 자칫하면 내 몸을 관에 넣어 공중걸이로 내려놓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늙은이의 아파트 생활은 마음에 내키질 않는다.’ (1978.12.25. 동아일보)

# 포장이사와 사다리차 등장

이사 관련 이미지.(출처 아이클릭아트)
이사 관련 이미지.(출처 아이클릭아트)

1980년대 들어 이사는 더욱 잦아졌다. 1979년 한 해 동안 서울시민의 21%가 이사를 했다는 통계가 나왔다.(1980.3.28. 경향신문) 이삿짐센터의 바가지요금, 세간 훼손, 웃돈과 식사 요구 등, 운영방식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이용자들의 원성도 높았다.

이에 몇몇 업체는 책임보험에 가입해 운반 도중 입은 피해 보상 방법을 마련하기도 했다. 신문에는 이사철마다 이삿짐센터를 이용하는 요령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이미 이용해본 사람의 추천을 받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에서 시작해 “허가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해야한다”거나 “전화로 의뢰할 게 아니라 직접 찾아가 관인 계약서를 통해 예약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등, 점차 소비자 보호를 위한 조치들이 마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사를 하기 위해 이삿짐센터에 의뢰를 했을 때도 짐꾼들에게 수고비 조로 웃돈을 더 주어야 가재도구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준다.(1985.3.29.매일경제)’는 기사는 현실을 비추는 씁쓸한 ‘팁’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포장이사’의 등장은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최근 이러한 모든 번거로움을 완벽하게 도맡아 처리해주는 전문 대행업체가 생겨나 인기를 끌며 자리잡아가고 있다. 짐 꾸리는 일에서부터 운반과 정리, 이사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가구 등의 손상에 대한 보수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이사 과정을 책임지는 이사 대행업이 그것이다.’ (1989.12.22. 한겨레)

이 기사에서 업체 근무자는 “평일에 집 열쇠만 맡기고 출근하면 퇴근 뒤에는 새로 이사 간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비용은 일반 이삿짐센터의 두세 배라고 한다. 포장이사가 ‘익스프레스’라 불리며 환영을 받자 온갖 이삿짐센터에서 ‘포장이사’라는 말을 붙여 광고했다. 그러나 역시 서비스는 엉망이었다. 이에 교통부는 ‘이사 화물 운송 취급 표준 약관’을 만들어 이를 지키고 서면 계약서를 작성하게 했다. 이 절차는 2000년대를 훌쩍 넘겨서야 겨우 자리를 잡게 됐다.

‘이사 풍속도가 달라지고 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이사가 가능해졌으며 이삿짐을 부리는 데 고가사다리차까지 등장하고 있다.’ (1991.3.27. 경향신문)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이사 방식은 점점 사람들의 욕구에 걸맞게 변해갔다. 건설에 사용하던 특수 장비인 사다리차를 이삿짐을 나르는 데 이용하게 된 것이다. 당시로선 그야말로 파격이고 혁신이었다.

요즘은 이사할 때 물건이 파손되거나 없어지는 걸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바가지요금을 뒤집어쓸 일도 거의 없다. 수십만에서 수백만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서 부실업체로 한 번 찍히면 폐업해야할 정도로 소비자의 목소리가 강해졌다. 포장이사부터 입주 청소까지 편하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

덕분에 난 엄마의 이사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다음 달 엄마의 이삿날엔 손수레와 삼륜차 대신 탑차와 사다리차가 현관 앞에 도착할 것이다. 포장이사를 마다하고 ‘옛날 방식’으로 하나하나 짐을 꾸려 넣은 상자를 식구들과 일꾼들이 힘들게 이고 지고 갈 필요가 없다.

마흔 중반에 마련한 집에서 일흔이 넘도록 살다가 이제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엄마. 엄마에게 이번 이사는 도전이나 마찬가지다. 열아홉 번째 이사, 생애 첫 아파트 생활이 엄마의 70대를, 그리고 이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몹시 궁금하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