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한강철교 폭파 후 도망할 때 미국 72시간에 자국민 도피
미군 월미도 공습예고 없이 폭격할 때 인천시내까지 네이팜탄
캠프마켓 부영공원은 제10부평기지포로수용소... 1475명 수용

인천투데이=김갑봉 기자 |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정학수 센터장)가 한국전쟁 70년을 기념한 다섯 번째 역사총서 ‘인천과 한국전쟁이야기(글누림 출판)’를 펴냈다.

저자는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과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전갑생 연구원이다. 책은 ‘한국전쟁 70년 평화를 묻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인천문화유산센터 역사총서5 '인천과 한국전쟁이야기(글누림, 전갑생)' 표지,
인천문화유산센터 역사총서5 '인천과 한국전쟁이야기(글누림, 전갑생)' 표지,

인천문화유산센터는 한국전쟁 70년을 기념한 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계간 황해문화(새얼문화재단 발간)에 실린 전갑생 선생의 연구논문을 보고, 출간을 의뢰했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1971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지역에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하다가 대학에서 국문학과 현대사를 전공하고, 서울대와 성공회대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전갑생 연구원은 한국냉전학회 이사를 맡아 학살과 수용소, 계급과 국가폭력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미국과 유럽, 아시아 주요 나라의 국립문서기록관 등에서 한국 근대사 자료를 수립하며 연구를 확장하고 있다.

이번에 출간한 ‘인천과 한국전쟁이야기’도 연구 연장선에 있다. 이 책은 저자가 미국 국립 문서기록보관청에서 수집한 문서와 사진 등의 자료를 토대로 집필한 책이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당시 미국이 자국민을 피난시키는 모습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한강철교를 건넌 뒤 폭파시키고 자기만 도망갔는데 미국은 72시간 만에 일본으로 도피시켰다.

1부 1장은 전쟁 발발직후 북한지역 피난민의 유입과 주한미국인의 대피과정, 돌아온 피난민들의 원조와 구호 등을 살폈다. 2장은 좌우에서 자행한 민간학살과 폭격에 관한 이야기를 다뤘다.

전쟁초기 민간인 학살은 인천소년형무소(현 인천구치소 터)와 동인천경찰서 유치장 외에 여러지역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했다. 저자는 미국 자료에서 동인천경찰서 유치장 집단학살과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관련 문서와 사진 등을 분석했다.

월미도 폭격과 민간인 희생도 빠질 수 없다. 월미도는 공습예고도 없이 초토화 됐고, 미군은 월미도는 물론 인천시내에 B-29 폭격기와 경폭격기를 동원해 네이팜탄까지 사용했다.

인천상륙작전 직전 인천이 북한 인민군 치하시절에 있을 때 당시 인민군 군인들이 북한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인천상륙작전으로 보내지 못하고, 그대로 미국 문서기록보관청에 보관된 편지도 공개됐다.

1950년 9월 15일 만석동 일대의 공장지대가 폭격으로 불타고 있다.(자료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 보관청, 자료수집 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1950년 9월 15일 만석동 일대의 공장지대가 폭격으로 불타고 있다.(자료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 보관청, 자료수집 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2부는 인천지역 포로수용소와 미군기지에 대한 이야기다. 2부 3장은 인천상륙작전 직후 월미도포로 집결소와 제2인천임시포로수용소, 제10부평기지포로수용소 등 국내 공개되지 않은 민군 자료를 토대로 수용소 현황과 인원, 주요 사건 등을 상세하게 다뤘다.

특히, 제10부평기지포로수용소는 지난 14일 개방한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에 속했던 곳으로, 현재 부영공원으로 불리는 곳이다.

부영공원에 포로수용소는 1953년 3월 설치됐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앞두고 협상과 교전이 치열할 때 1953년 6월 제10포로수용소에서 대규모 탈출 사건이 발생해 40여명이 사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대규모탈출사건은 이승만 정부가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부추긴 계획이었다. 부평포로수용소에는 1475명이 수용돼 있었고, 이중 583명이 탈출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41명이 죽고, 107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75명이 체포됐다.

저자는 “한국전쟁기 인천은 유엔군의 강력한 힘을 체험했으며, 융단폭격과 네이팜탄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성, 좌우 갈등에 기인한 민간인학살, 폐허에서 구조호 원조라는 또 다른 신화를 겪은 도시였다. 인천 사람들은 끝나지 않은 전쟁의 시간적 영역, 폭격과 학살이라는 직접적인 체험, 북한 인민군 점령기와 재탈환이라는 체제 변동의 혼란, 이념의 충돌과 반공주의 교육 속에서 분단의 트라우마를 겪어왔다”며 “이제 전후 세대와 미래세대를 위한 역사교육은 평화학에 기초해 20세기의 야만적인 사건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토론과 학습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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