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석 인하대박물관 학예연구사
1908년 겨울, 충청남도 서산군의 한 주막에 일본 순사들이 들이닥쳤다. 마침 주막 안에 앉아있던 허름한 차림의 농부 한 명이 이들의 눈에 들어왔다. 순사들은 얼마 전 인근 동리에서 정체모를 무리들이 민가를 이틀 연속 습격하고 달아난 사건을 추적해왔다.

그들이 어딘가 모르게 외모가 남달랐던 주막 안의 남자를 그냥 놓아 보낼 리 없었다. 곧바로 취조를 시작했다. 과연 주모자 중의 한 사람으로 판명이 났다. 내친 김에 잔여세력들을 계속 추적해 척후병들을 발견하고 쫓았으나, 우거진 송림 사이로 탈출해 검거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척후병들이 버리고 간 총기 5점, 그리고 용의자 한 명을 체포해 범인들의 두목과 정체를 알아낸 데 만족해야했다.

충청남도 경찰사(警察使)가 당시 내부대신이었던 송병준에게 보고한 이 사건의 보고서 제목은 ‘폭도 체포의 건’이다. 이 무렵에 ‘폭도’ 또는 ‘적도(賊徒)’라고 지칭된 무리들은 대개 의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사건도 의병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스럽다.

이때 주막에서 붙잡힌 남자는 윤성팔이라는 자로 본래 부평군 수탄면 오류동 출신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수탄면이라면 지금은 서울시 구로구쯤에 해당되는 지역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계속 부평도호부에 속해 있던 곳이다. 수탄면 오류동은 또한 강기동 의병장의 가족이 거주하던 곳이기도 한데, 강기동은 일제의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던 중, 헌병대에 붙잡혀 온 의병들을 탈출시키고 자신도 의병부대에 투신해 후에 의병대장까지 지낸 인물이다.

가족들의 거처를 잠복 수사했던 일제 경찰들의 보고를 보면, 강기동은 일제와 전투를 한창 벌이면서도 가끔 야밤을 이용해 가족들을 만나러 찾아오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일제 토벌대에 체포돼 서른 살의 나이에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부평지역은 이미 단발령이 공포된 1895년 무렵부터 단발령에 반대하는 집회를 아침, 저녁으로 개최하며 토론을 벌이고 청원운동까지 추진했던 경험을 갖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런 탓인지 ‘적도’ 사건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고, 부평을 거쳐 ‘전향’을 단행하는 인물들도 간혹 보인다.

예를 들어,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가입해 전북지부 회장까지 지내고 이를 바탕으로 군수 자리를 따내 부평군수에 임명됐던 전협은 군수직을 마치고 1909년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3․1운동 후 대동단을 결성, 결국 옥고를 겪으며 순국하기도 했다. 전협은 부평군수 시절 부평에 있던 윤치호 소유의 땅을 문서를 위조해 사취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부평지역에서 활약했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는 정용대 의진이 있다. 한국군 장교 출신인 정용대는 군대 해산 후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1908년 부평군 읍내를 공격했다가 아군 네 명을 생포당한 채 패퇴하기도 했으나 1909년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기 전까지 경기도 일대에서 이름을 알린 의병장이었다.

이와 같은 부평지역의 항일 전통이 3․1운동으로 이어져 1919년 황어장에서 대규모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던 일은 익히 알려진 일이며, 나아가 일제 말기에 히로나카(弘中)상회에 근무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 검거된 이연형이나 정재철 같은 이들도 그러한 전통 위에 놓여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93주년 3․1절을 맞이하면서 부평지역의 항일운동이 얼마나 계승되고 재현되었는가를 되돌아보면 우울한 느낌을 접을 수 없다. 3․1운동은 거족적인 민족운동이며 황어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촉발시켰던 심혁성은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임은 분명하다.

그 외에도 짧은 기간이든 장기간이든, 또 소극적 저항이든 적극적 저항이든 부평지역에는 부당한 억압에 대한 민초들의 저항이 미약하나마 계속 이어져왔다. 그리고 그러한 저항의 전통은 부평을 ‘반골의 도시’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경험으로 남아있다고 믿는다.

이번 3․1절을 맞아 부평지역의 기념행사가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무엇보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항일의 기록들을 발굴해 미완성된 저항의 역사를 채워가는 일이 급선무가 되어야하며 그러한 작업은 과거의 골동품적 가치에 주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사에서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일로 이어져야한다. 그리고 결국은 그러한 가치들이 바로 지금, 지역의 현안을 해결하는 데 원동력으로 작용해야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골동품들은 보여주기 위함이 목적이 아니다. 교감과 교육을 통한 변화, 그것이 골동품의 진정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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